[생각을 깨우는 한시 (7)] 홀문하동사자후(忽聞河東獅子吼) 주장낙수심망연(杖落手心茫然)
당송팔대가로 유명한 동파 소식(蘇軾·1036~1101)이 벗 오덕인(吳德仁)에게 보낸 글이다. 어느 날 친구인 진계상(陳季常)의 부인 하동(河東) 류씨(柳氏)가 남편 일당에게 쓴소리를 했다. 그 바람에 신랑은 얼마나 놀랐던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까지 놓칠 정도로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다. 오도송(悟道頌·깨달음의 노래)을 남길 만큼 불교에 조예가 깊은 문장가답게 ‘바가지’를 훌륭한 설법이라는 뜻인 ‘사자후’로 대치했다. 이 일로 인해 ‘하동사자후’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앞 문장인 “밤새 공(空·없음)과 유(有·있음)를 말하다가(談空說有夜不眠) ‘류씨의 사자후’를 듣게 된 용구거사가 실로 가련하다(龍丘居士亦可憐)”로 추측하건대, 소동파를 포함한 몇몇 도반이 용구(진계상)거사 집에서 도(道)에 대한 고담준론으로 밤을 지새웠던 모양이다. 동파육(東坡肉)을 개발할 만큼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를 시중 드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적인(?) 신랑이 ‘노는 물’에 어울리는 것조차 못마땅했다. 이래저래 모임의 좌장 격인 소동파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었다. 참고 참다가 드디어 폭발했는데 거의 암사자의 고함소리에 버금갔다. 동쪽(남편 방향)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실은 서쪽(동파 방향)을 친 것이다. 소동파는 부부의 일로 여기고는 자기반성은커녕 오히려 친구의 처지를 동정하는 시까지 남겼다.

기록하는 사람(문인 기자 등)과 동석했을 때는 말과 행동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 역사적 인물(?)로 등재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밤새 벌어지는 비생산적인 공리공론의 반복을 참다 못한 부인이 내지른 할(喝) 때문에 졸지에 신랑은 공처가의 대명사가 되고 자신은 악처로 낙인 찍혔으며, 또 친정인 하동 류씨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결과를 빚었기 때문이다. 사족을 보탠다. 끝까지 참았어야 했느니라.

원철 <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