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김영란법 시대…'만남' 두려워하면 미래 없다
일명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28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대다수 국민의 일상적 가치체계와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거대한 전환점이다.

이제 이 법을 둘러싼 그간의 숱한 논란은 뒤로 물렸으면 한다. 기자 또한 법 제정 취지와 세부 시행법령 사이의 정합성에 품어왔던 의구심을 거둬들이려 한다.

대신 몇 가지 걱정과 함께 법적용 당사자로서 스스로의 다짐을 전하고 싶다. 그것은 답답하고 불편할지 모르는 온갖 금지 규정과 국민권익위원회의 넘쳐나는 유권해석을 몇 개의 다른 키워드로, 전향적으로 압축하는 데서 시작한다. 소통과 신뢰, 그리고 통합이다.
< 2만5000원짜리 ‘국감 도시락’ > 김영란법 시행을 하루 앞두고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이 27일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 오전 국정감사를 마친 뒤 점심식사로 2만5000원짜리 도시락을 먹고 있다. 연합뉴스
< 2만5000원짜리 ‘국감 도시락’ > 김영란법 시행을 하루 앞두고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이 27일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 오전 국정감사를 마친 뒤 점심식사로 2만5000원짜리 도시락을 먹고 있다. 연합뉴스
요즘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 ‘어떤 일이 있어도 시범케이스로 걸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시행 초기에 법 위반으로 적발되거나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면 엄청난 곤욕을 치를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등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 만남을 금액으로 재단하고 실시간으로 측정해야 하는 번거로움, 민원과 청탁의 모호한 경계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당장 오늘부터 ‘약속절벽’이 나타나고, 애꿎은 식당들은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공무원은 민원인과의 접촉을 꺼리고 있다. 청와대 사람들조차 당분간 외부인을 만나지 않겠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고 한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가? 김영란법은 부정청탁을 금지하고 식사 접대는 1인당 3만원, 선물 제공 5만원, 경조사비 지원은 10만원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이 정도의 규제 때문에 만남 자체를 피하는 국가에 온전한 미래가 있을까.

김영란법은 서로 ‘형님’ ‘동생’하며 반칙과 편법을 일삼던 타락한 인간관계와의 단절을 목표로 한다. 그 자리에 법치와 제도의 규율을 받는 새로운 관계의 정립을 시도한다. 규제를 피하기 위해 공무원에게 향응과 뇌물을 바쳐야했던 관행, 기회를 독점하기 위해 혈연 학연 지연을 동원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부패고리를 차단하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통은 단절돼선 안 된다. 아직도 많은 기업인은 점심 저녁 시간도 모자라 조찬 약속까지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신문과 비즈니스 미디어의 동정란을 살피면서 참석할 만한 세미나와 강연을 눈여겨본다. 사업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고 자신의 구상을 검증받으며, 일을 어떻게 꾸려나갈지를 고민하는 자리의 연속이다.

지금까지 대부분 기성세대가 그랬다. 학교나 직장 모두에서 결사적이었다. 대한민국의 낮과 밤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치적 구호까지 나왔을까.

세계인들이 ‘다이내믹 코리아’의 한 단면으로 제시하는 한국의 대낮 같은 밤거리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출세하고 싶다’ ‘잘살고 싶다’는 개인적 열망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충정을 모두 녹여냈고, 그것은 경제적 번성으로 이어졌다.

한낱 술주정으로 끝나고 음성적인 거래가 횡행할 때도 없지 않았지만 퇴근길에 “소주 한잔 하자”는 제의는 변화하고 발전하는 공동체 안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다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확인하고 메워주기 위해 지식과 경험의 보따리를 풀어내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들을 싸잡아 접대와 향응이라고 한다면 우리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비하요, 과소평가다.

만남에는 긴장이 따른다. 만나야 할 이유가 있기에 만나는 것이다. 앉아있는 시간 동안 누구도 그 이유를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사전에 준비를 한다. 상대의 관심사를 미리 파악하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지식을 챙긴다.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질문을 하려면 미리 공부를 해둬야 한다. 일반인들은 세세한 취재과정을 알기 어렵지만, 식사대접 같은 취재 편의는 전체 과정의 1%도 되지 않는다. 취재원은 준비 없이 허둥지둥 나온 기자를 여간해서 다시 만나주지 않는다. 질문이 엉성하고 시쳇말로 ‘갑질만 하는’ 기자에겐 본인이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갈수록 평평해지고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1861~1865) 시절, 미국 워싱턴에서 출발한 대통령 취임연설문 우편이 서부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는 데는 여드레가 걸렸다. 그 전에 역마차로 보내던 시절에는 보름이 걸렸다. 지금은 어떠한가.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정견 발표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코멘트를 날리는 시대다.

기자든, 사업가든, 공무원이든 계속 질문만 하는 사람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실리콘밸리의 인공지능 이야기가 어느새 화제를 바꿔 선진국의 통상압력과 환율전쟁으로 건너간다.

공무원은 기업인을 만나야 비즈니스 생태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새로운 정책을 입안할 수 있다. 기업인은 관료와 교수들을 만나야 전체 정책의 흐름과 거시경제를 둘러싼 변수를 경영에 반영할 수 있다.

누가 이 모든 지식을 만들어내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일까. 포털 검색으로는 안 된다.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기심과 탐구욕, 나의 성취를 공동체 발전과 동일시하는 인식의 전환만이 집단지성을 길어 올리는 자양분 역할을 한다. 소통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그저 밥을 함께 먹는 것이 아니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밥 먹는 자리의 의미가 더 커졌다. 비용과 부담에 비례해 소통의 질도 더 높아져야 한다. 미래 지향적이고 생산적인 성찰과 토론이 이뤄지는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민원인들 못 만나겠다”는 공무원들의 푸념은 적잖게 실망스럽다.

갑(甲)과 을(乙), 부정과 청탁으로 일그러지는 관계의 타락도 전향적인 소통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 금수저와 흙수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기성과 신진 세대 간 기회의 불평등을 제거하지 않으면 계층 간, 세대 간 신뢰회복이 어렵다. 공정경쟁은 사회통합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큰 강은 작은 물길이 모여야 흐르는 것이다.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밤늦은 시간에 커피숍에 삼삼오오 앉아있는 대학생과 직장인들을 보라. 그들은 더 이상 술잔을 기울이지 않아도 충분히 대화하고 있다. 더치페이도 일상화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누구보다도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공정경쟁을 가로막는 접대와 향응이 사라지면 김영란법의 숨 막히는 규제 조항들도 빛이 바랠 것이다.

400만여명에 이르는 법 적용 대상자들이 선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바쁘게 살아온 사람들이 김영란법 뒤에 숨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소통 방식을 바꾸고 만남의 질을 고양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공동체 지식의 용광로에 불을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자주 만나야 할 시대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일훈 증권부장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