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당일 한강 난지캠핑장 함께 가실 분 2명 모집합니다. 현재 6명 함께하기로 했고요, 통기타와 블루투스 스피커 구비돼 있습니다.’

김 과장은 이번 추석 연휴를 고향인 부산 대신 서울에서 보낸다. 매년 귀성하면 ‘장가가라’는 부모님 성화뿐 아니라 ‘놀아달라’고 보채는 어린 조카에게 시달려온 데다 돌아올 땐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황금연휴를 망치기 일쑤여서다. 2주 전 미리 짧게 고향집에 다녀온 그는 캠핑동호회에 ‘벙개’를 쳤다. “많이들 고향에 가서 한적한 캠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관심 있는 여성 회원분도 캠핑장에 온다고 해서 더 설렙니다.”

추석을 맞이해 전국의 김과장 이대리들이 ‘명절 전략’을 짜고 있다. 고향 대신 해외여행을 선택하는 이도 많고, 휴일조차 없는 근무 일정에 눈물을 글썽이는 이도 있다. 명절 때마다 불거지는 고부 갈등은 여전한 고민거리다. 직장인들의 생생한 ‘명절나기’ 계획을 들어보자.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추석 연휴는 직장동료·친구와

보험회사에 다니는 전모씨는 명절만 되면 거래처에 보내는 선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연차가 낮은 전씨는 거래처, 퇴직 임원 등에게 선물 보내는 일을 도맡고 있다. 이름과 배송지 등을 잘 추려서 발송하는 건 쉽다. 문제는 선물을 보낸 이후다. 받을 사람이 이사를 가거나 주소가 틀려 제대로 도착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 때문에 전씨는 설날이나 추석 당일에도 택배기사들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 “여기 A택배인데요. 배송지에 도착해보니 B님은 얼마 전에 이사가셨다고 하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물음에 가슴이 답답한 건 전씨도 마찬가지다.

지인들에게 보낼 선물 발송을 전씨에게 떠넘기는 회사 상사들도 골칫거리다. 선물 값은 따로 줄 테니 이왕 선물을 보내는 김에 자기 지인에게도 같이 보내달라는 것이다. “회사에서 보내는 선물 관리하기도 힘든데, 개인적으로 부탁해놓고 ‘잘 보냈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상사들 때문에 힘들어요. ‘김영란법’이 발효되면 선물 보낼 일이 줄어들 것 같아 내심 기대합니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장모씨는 매년 연휴 때 직장 동료들과 명절을 쇤다. 병원 특성상 연휴 때도 평소처럼 근무해야 해서다. 대신 똑같이 고향에 못 간 미혼 동료들과 함께 회식을 즐긴다. 올해는 장씨의 집에서 각자 만든 음식 하나씩을 가져와 노는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를 열기로 했다. 장씨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시내에서 한적하게 연휴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연휴 근무로 생기는 추가 수당도 쏠쏠하다”고 말했다.

리조트 회사에 근무하는 이모 대리는 2011년 입사 이후 명절을 가족과 보낸 적이 없다. 대구 출신으로 제주도의 대형 콘도미니엄에서 근무하는데, 명절 때면 여름 휴가철에 버금가는 관광객이 몰리는 터라 ‘휴가 좀 주세요’란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된다. “어차피 고향에 갈 비행기표도 동나 구하기 어려운데 일하며 돈이나 벌죠 뭐.”

“황금연휴에 ‘효도 여행’이라뇨”

결혼 4년차인 직장인 정모씨는 처녀 때 친구들과의 도쿄 여행 계획을 취소했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느라 힘들었다’고 압박해 남편 허락은 얻었지만 갑작스런 시어머니의 가족 여행 제안 때문이다. 친구들과 여행 가려 했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회사 다니느라 잘 못 보던 애를 또 떨어뜨려 놓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아들인 남편에겐 “애 봐달라고 할 때만 우리를 찾는다. 섭섭하다”고 했다.

결국 정씨는 ‘효도 여행’을 선택했다. 두고두고 시달릴 게 뻔해서다. “2박3일간 시어머니와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연휴에도 시댁 근무를 하면 워킹맘들은 대체 언제 쉬나요?”

박모 차장은 다가오는 추석 연휴가 반갑지만은 않다. 지난 설 연휴 때 시집에서 만난 아내와 형수가 크게 말다툼을 하면서 관계가 틀어져서다. 아내보다 나이가 어린 형수는 설 연휴 내내 어린 조카를 핑계로 부엌 일을 미뤘다. 두고 보던 아내가 형수에게 “조카를 봐줄 테니 부엌 일을 좀 도와달라”며 나섰다가 박 차장과 형까지 가세한 큰 싸움이 터졌다.

“노총각 형을 구제해준 건 정말 고맙지만, 나이도 어린데 아내한테 반말하는 걸 보니 저도 화나더라고요. 부모님이 형수를 나무라며 끝났지만, 영 불편해서 이번 연휴 때 차례만 지내고 바로 올라올 계획입니다.”

명절 탓에 이산가족 선택한 사람들

전자회사에 다니는 구모 부장은 지난 9일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런던에 살고 있는 아내와 두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외교관인 부인과 결혼한 그는 2011~2014년 아내의 서울 외교부 근무 때만 빼고선 벌써 10년째 ‘기러기’ 신세다. 매년 명절 때마다 구 부장이 회사 눈칫밥을 먹어가며 휴가를 내 아이들을 찾는다.

그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자꾸만 아이들이랑 서먹해지는 느낌”이라며 “아내가 명절 때는 시집이 있는 한국에 오려 하지 않아 주로 내가 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유통업체에 다니는 박모 차장은 최근 카카오톡을 탈퇴하고 라인을 깔았다. 친구의 시어머니가 카톡으로 “이번 명절에 무슨 무슨 음식을 해와라”며 잔소리하는 걸 보고 바로 바꿨다. 박 차장의 시어머니도 지난해 스마트폰을 사더니 최근 심심찮게 카톡을 보내와서다. 박 차장은 추석 때 시집에 가면 시어머니가 카톡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볼 것을 예상해 “회사에서 보안상 이유로 카톡을 금지했다”고 둘러댈 핑계도 마련해놨다.

윤아영 기자 youngmon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