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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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세 살짜리 조카를 화장실에서 폭행하고 학대해 숨지게 한 20대 이모가 경찰에 구속됐다. 10대 여자친구의 이별 통보에 화가 나 여자친구와 그 친구를 숨지게 한 30대 남성이 지난 7일 대법원으로부터 무기징역 확정판결을 받았다. 분노를 참지 못해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우리 사회에서 눈에 띄게 늘고 있다. 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주최로 이 같은 한국 사회의 분노조절장애 현상을 주제로 한림원탁토론회가 열렸다.
"왜 나 무시해"…어린시절 좌절이 키운 분노장애
◆어린 시절 부모 관계가 분노 조절 영향

소아정신 전문가인 김재원 서울대 의대 교수는 “사람이 화를 몇 번 낸 걸 보고 분노조절장애를 겪는다고 볼 수 없다”며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분노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분노조절장애란 말은 없다. 분노의 세기나 지속시간, 빈도에 따라 사용되는 용어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이 화를 내고 화해로 끝을 맺지만, 병원 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있다. 미국정신의학회가 마련한 진단체계(DSM-5)에 따라 간헐적 폭발장애나 양극성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적대적 반항장애, 파괴적 기분조절부전장애로 판명될 때다. 대표적인 사례가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간헐적 폭발장애다. 흔히 어린 시절 아버지의 육아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방임, 학대를 받거나 외상을 입은 사람에게 나타난다. 분노 장애 환자들은 영화에도 등장한다. 1993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미스터 존스’의 주인공 하워드 존스(리처드 기어 분)는 콘서트에 갔다가 갑자기 마음이 들떠 무대에 뛰어올랐다가 끌려 내려온다. 그는 자신을 제지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분을 참지 못한다. 흔히 조울증으로도 불리는 양극성장애 환자에게 일어나는 증상이다. 김 교수는 “분노 장애 대부분이 어릴 때 부모·가족 간 상호작용에서 문제가 시작된다”며 “지나치게 무관심한 육아 태도와 과도한 권위적인 양육에 길든 아이가 수치심과 좌절감을 조절하는 데 실패한다”고 경고했다.

뇌 과학자들은 분노 장애가 뇌 이상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뇌와 성격의 연구는 1880년대 미국 철도 공사장에서 사고로 뇌를 다친 노동자 연구에서 비롯됐다. 그는 쇠로 된 봉이 머리 앞부분 전두엽을 뚫고 지나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사고 이후 온순하던 성격은 180도 변했다. 전두엽 기능이 떨어지면 분노와 충동 장애를 겪는다. 전두엽이 행동의 브레이크라면 대뇌 편도체(아미그달라)는 액셀러레이터 기능을 한다. 배우자를 학대하는 경계성장애 환자의 뇌를 촬영하면 감정 중추 역할을 하는 이 부위가 과잉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뇌과학자인 김재진 연세대 의대 교수는 “분노 조절이 안되는 사람은 뇌의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가 오작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 자기주장 강해 좌절 더 겪어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에 분노 장애를 겪는 사람이 늘었는지, 분노 장애 환자들의 증상이 더 악화한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왜 분노를 쉽게 삭이지 못하는 사람이 자주 눈에 띄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분노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대표적으로 좌절 공격 이론이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때 좌절을 겪는다. 좌절에 따른 박탈이 합리적이지 못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공격 성향이 강해진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파로 꽉 찬 지하철에서 발을 밟힐 때보다 텅 빈 지하철에서 발을 밟힐 때 더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이치”라고 말했다.

여기에 한국인만이 가진 고유한 사고방식이 한몫한다. 허 교수는 “한국인은 자신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주체성이 강하고 자기 고양적 편향이 강한 편”이라며 “자신의 정치적 의사나 주장과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면 무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경찰청 과학적범죄분석시스템(SCAS)이 2006년부터 올해 2월 살인사건 917건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절반 이상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아 살해를 저질렀다고 나타났다. 한국인은 상대가 어떤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려는 심정 중심주의적 성향도 강하다. 상대 운전자가 일부러 차선을 끼어들었다고 오인해서 발생하는 보복 운전이나 위층과 아래층 주민 간 벌어지는 층간소음 분쟁이 여기에 해당한다. 허 교수는 “한국인은 사회나 정부도 가족처럼 생각하는 성향이 강하다”며 “우리 사회 소득 양극화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다 보니 갈등이 더 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분노는 본능, 해소 장치 필요

진화론 전문가인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분노가 없었다면 인간이 외부 공격으로부터 종족을 지키지 못했다”며 “분노는 인류가 생존하면서 버리지 않은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 교토대 영장류연구소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인 침팬지 14마리 집단을 분석한 결과 리더인 수컷 침팬지가 매일 주기적으로 어린 새끼를 비롯해 무리 내 약자를 때리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침팬지 무리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장 교수는 인간이 침팬지보다 집단 규모가 3배 이상 큰 이유도 큰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뇌가 커졌고 그만큼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역시 분노를 쉽게 병처럼 다루는 점에는 반대 견해를 내놨다. 그는 분노로 인한 공멸을 사회적으로 극복하는 이누이트족 사례를 들며 “이누이트족이 분한 감정을 조절하는 일을 사회의 최대 가치로 본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도 거시적인 예방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