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혜 기자
민지혜 기자
“향수를 완성하는 일은 종갓집에서 장을 담그는 것과 비슷해요. 향료를 숙성시키는 데 길게는 11주를 기다려야 하거든요. 온도, 습도 다 맞춰야 하는 건 물론이고 계속 일정한 속도로 저어주면서 점도와 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장은영 페르푸뭄 대표는 조향사 겸 최고경영자(CEO)다. 스스로 전문 경영인이 아니라 예술가라고 할 정도로 향에 빠져 산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조향 전문학교 ‘생키엠 셍(Cinquime Sens)’을 2014년에 졸업했다. 이 학교의 이름은 ‘5번째 감각’, 즉 후각을 일컫는다. 대규모로 수업하지 않고 1 대 1 또는 4~5명씩 소규모로 강의하기 때문에 수강료가 비싸고 독창적인 조향기술 등을 배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킬리안, 밀러 해리스, 베로 케른 등 니치향수 브랜드의 오너들이 졸업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향사는 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영감을 받아 세상에 없는 향을 만들어내는 아티스트”라고 말하는 장 대표를 26일 서울 도산공원 옆 페르푸뭄 본점에서 만났다.

“조향사는 향을 만들어내는 아티스트”

[人사이드 人터뷰] "조향사는 아티스트" 장은영 페르푸뭄 대표
매장 안에 들어서자 어디에서도 맡아보지 못한 향이 풍겨왔다. 딱 한 가지 향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깊이 있는 향이었다. 화려한 명품 숍을 연상시키는 금빛의 인테리어는 투명한 향수병을 더 영롱하게 만들기 위한 장 대표의 아이디어다. 페르푸뭄이라는 향수 브랜드는 ‘퍼퓸’의 라틴어다. ‘신에게 연기로 분향한다’는 뜻을 가진 어원처럼 성스럽게 비밀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페르푸뭄은 대중화된 향수도, 최근 인기를 끄는 니치향수도 아니다. ‘조말론’ ‘아닉구딸’ 같은 니치향수가 독특한 향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브랜드라면, 페르푸뭄은 소량으로 아주 독창적인 향을 만드는 ‘레어향수’를 지향한다.

장 대표는 2014년 프랑스 조향 학교를 졸업한 뒤 2년여간 총 48종의 샘플을 만들었다. 18개 계열로 나뉘는 향조에서 300여종의 향료를 골라낸 뒤 이들을 배합해 자신만의 향을 48개로 만든 것. 이 샘플에서 향료 비율 등을 바꿔 완성품의 향수를 내놓는다. 장 대표가 향수 한 개를 만들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6개월가량. 매장 안쪽의 작업실은 온도와 습도 등 최적의 조건을 맞춰놨다. 한 번 제조할 때 완성되는 건 50mL 기준으로 20병밖에 안 된다. 그렇다고 공장에 맡길 생각은 없다고 했다. “최상의 품질을 유지하면서 애초에 영감을 받은 향을 완성하려면 손으로 작업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가격대도 30만~50만원대(50mL)로 비싼 편이지만 원재료값에 비하면 싸게 책정했다는 게 장 대표의 설명이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최상급 품질의 월하향, 핑크페퍼, 재스민 앱솔루트, 로즈 앱솔루트, 무궁화향 등을 일일이 수입해오는 데도 한참 걸렸어요. 개인이 이런 향료를 들여온 적이 없기 때문에 세관을 통과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고요.” 월하향은 300mL가 500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향료다. ‘앱솔루트’가 붙은 향료는 물로 증류하는 일반 방식이 아니라 휘발성 원료를 넣고 여과해서 한 방울씩 추출해 낸다. 증류 방식보다 더 섬세한 향을 낼 수 있다.

대표 향수 ‘라이브러리 오브 발타자르’

[人사이드 人터뷰] "조향사는 아티스트" 장은영 페르푸뭄 대표
장 대표가 들여온 향료 300여종은 올해 향수 10개를 내놓기 위한 원재료다. 무궁화 나무에서 추출한 시스트는 페르푸뭄의 대표 향수인 ‘라이브러리 오브 발타자르’의 고서(古書) 향을 내는 원재료로 쓰였다. 이 향수는 역사 속 세 명의 발타자르를 떠올리며 그들의 서재에서 났을 법한 고서 향을 담았다. 이 향수처럼 페르푸뭄의 제품은 향과 이름이 독특하다. 청명한 달빛 아래 계수나무를 떠올리며 만든 ‘오스만투스 수 라 룬 클레어’가 대표적이다.

‘술탄스 바자르’는 향료들이 가득한 바자르시장에서 술탄왕에게 진상하는 이국적 향수를 형상화했다. 향수에서 보조 용도로 쓰이는 스파이스 계열의 시나몬, 카르다뭄, 커리엔더, 꿀을 정제해 만든 향료 등을 담았다. 이국적인 향을 내기 때문에 최근 방문한 아랍에미리트(UAE) 관광객과 중국의 부호 등 외국인들이 사갔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떠올리며 영국풍의 허브향을 담아 만든 ‘프레주디스’, 시슬리 오렌지 베르가못 오렌지플라워 등 시트러스 계열을 총망라한 ‘오드 드 포’도 상큼하지만 가볍지 않은 향을 낸다. 시추안 페퍼, 샤프란, 딜 등을 넣어 상쾌함과 깊은 심연의 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디바인 오어 데블’은 누구나 갖고 있는 양면성에서 착안한 제품이다.

장 대표가 ‘맞춤 향수’를 만들지 않는 이유는 완성도 때문이다. 조향 과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이 선호하는 향만을 담다 보면 조악한 조합이 되기 쉬워서 완벽한 조합으로 제대로 된 향수를 내놓으려는 취지다. 다만 한 가지 향을 여러 버전으로 만든 시리즈 향수를 내놓을 계획이다. 장 대표는 “인간의 감각 중에 가장 민감한 게 후각이기 때문에 추억의 장소를 떠올리거나 소중한 사람, 기억을 되살려내는 힘이 향수에 있다”고 했다. “시트러스 계열의 오렌지플라워 향을 맡았을 때 저는 어릴 적 엄마와 같이 간 이탈리안 경양식 집이 떠올랐어요. 향수는 마치 추억을 되살리는 타임머신 같기 때문에 사람의 감정과 인생 자체를 풍요롭게 해줄 수 있죠.”

장 대표가 생각하는 조향이란 그림을 그리는 일과도 같다. 책을 보고 여행을 하면서 영감을 얻은 뒤 분명한 콘셉트를 잡는다. 다방면으로 교양을 쌓는 것도 조향사에겐 일의 연장선이다. 장 대표는 한국외국어대 불어불문학과를 나와 스위스 세자르리츠 호텔스쿨, 프랑스 르꼬르동블루, 미국 코넬대 호텔경영대학원 등에서 공부했다. 신라호텔과 CJ CGV, 부동산 자문·관리 전문회사 새빌스코리아와 이케아코리아의 부동산개발부에서 근무했다.

“성과보다 아름다움 추구하는 삶에 눈떠”

“어릴 때는 발레, 리듬체조, 작곡을 배웠어요. 과제를 해나가듯 하나씩 마침표를 찍어온 셈이죠. 직장생활을 하며 잘살고 있던 2013년 봄이었는데 어느 날 생각해 보니 벚꽃을 한 번도 즐긴 적이 없더라고요. 그동안은 성과 위주의 삶을 살았지만 앞으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조향을 배우러 파리에 갔어요. 그런데 배우다 보니 너무 매력적이더라고요. 나만의 샘플을 만들고 나니 이걸 완성품으로 내놔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그래서 지난해 11월 매장 문을 열었어요.”

장 대표는 원재료뿐 아니라 병도 수작업을 거친 특별한 제품을 쓴다. 체코에서 직접 수입한 시약병은 스프레이 타입보다는 불편하지만 한 방울씩 떨어뜨려 은은한 향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스프레이 방식을 쓰지 않는 건 “타인의 공간까지도 침범해서 향을 과하게 뿜어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병목에도 고급 기모노에 쓰는 금실을 수십 번 둘렀고 빨간 왁스로 인장을 찍듯 제품명을 새겨넣었다. 모두 최고급을 지향하는 장 대표의 철학을 반영했다.

그의 목표는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과 소중한 사람들, 감정과 이미지 등을 향수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오랜 과정을 거쳐 제품으로 탄생시켰을 때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향수가 팔리면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만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 향수를 드디어 찾았다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행복을 느끼죠.”

조향사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요청하자 장 대표는 “기술자가 될 건지, 예술가가 될 건지부터 결정하라”고 했다. “기왕이면 어느 정도 인생 경험도 하고 많은 향수를 접해본 뒤 30~40대쯤 조향을 공부하는 게 좋아요. 문학적 소양도 많이 쌓고 재료를 깊이 있게 파고들면서 공부해야 해요. 이 모든 작업을 즐거워할 줄 알아야 정말 재밌게 이 일을 할 수 있어요.”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