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왜 선도기업은 실패하는가. 많은 사람은 선도기업의 실패 원인을 성공으로부터의 자만심이라고 말하곤 한다.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다소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선도기업이 실패하는 것은 그들이 자만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열심히 해서’라는 것이다. 그것도 너무 열심히 해서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미 세상이 바뀌고 있고 새로운 게임의 룰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이 이제까지 자신의 성공을 이끌어오던 방식으로 열심히 한다는 점이다.

1989년 37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경영컨설팅, 정부부처 자문관, 벤처기업 창업과 운영 등 다양한 경력을 쌓은 뒤 하버드 경영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한 크리스텐슨은 자신의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매우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1997년 발간된 《혁신자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는 크리스텐슨을 일약 경영학계의 스타로 만들었다.

코닥·노키아의 몰락…'달콤한 관성' 깨지 못하면 파괴당한다
그의 연구 결과는 기존의 생각을 뛰어넘어 전략과 조직에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최근 전개되고 있는 극심한 불확실성과 기업의 부침은 그가 제시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새삼 돌아보게끔 한다. 이제는 중요한 경영 용어가 되다시피 한 파괴적 혁신은 애초의 의미를 넘어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왜 잘나가던 기업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통찰력이다.

모든 성공적인 기업은 어떤 유형으로든 시장과 고객에게 의미 있는 가치를 제공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성공적인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일단 성공의 길로 접어들면 그 기업은 나름대로 구축해놓은 성공방식을 더욱 정교화하고 효율화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날 때까지 이런 경영방식은 매우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외부환경이 변화하면서 문제는 시작된다. 기술이 급격하게 변한다든가, 시장에서 고객의 사고와 행동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 방향을 바꾸기 시작하면 성공적인 기업의 경영방식이 더 이상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환경 변화가 시작되면 기업이 그에 맞춰 합당한 변화를 해나가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일이 실제 기업경영에서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그렇다. 코닥이 무너져내린 것이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노키아가 몰락한 사례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세상 변화를 몰라서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변화를 알았지만 스스로가 그에 맞춰 변화하지 못해서 실패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크리스텐슨의 연구에 따르면 이렇듯 성공한 기업은 어느 순간부터 실패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바로 파괴적 혁신이 그 분기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파괴적 혁신이란 시장에 새롭게 소개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구현되는데, 초기엔 대다수의 기존 고객이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등장한다. 많은 경우 이런 신제품이나 신서비스는 기존 제품이나 서비스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거나 단순하고 가격이 싼 특징이 있다. 컴퓨터산업 역사에서 메인프레임이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등장한 미니컴퓨터, 이어 등장한 PC 등이 대표적인 파괴적 혁신의 사례다. 기존 제품에 비해 많은 측면에서 떨어졌지만 고객이 필요한 정도의 성능을 현격하게 낮은 가격으로 제공해 결국 기존 시장을 대체해버린 것이다.

그러면 왜 성공하는 기업이 환경 변화를 알면서도 스스로의 변신에 실패하는 것일까. 크리스텐슨이 파괴적 혁신의 ‘원칙’이라고 얘기한 다섯 가지를 근거로 정리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첫째,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고객과 투자가다. 여기에서 고객은 기존 고객을 말하고 투자가는 주요 주주를 의미한다. 즉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기존 고객을 더 만족시키고 단기적인 수익을 원하는 대다수 주주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지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기존에 하던 방식을 더 잘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둘째, 파괴적 혁신이 이뤄지는 새로운 시장은 전형적으로 작게 시작하기 때문에 커다란 시장에 들어가 있는 기존 성공적인 기업의 관심을 끌기 힘들다. 성공적인 기업은 이미 확보한 큰 시장에서 돈을 잘 벌고 있는데, 이들이 미미해 보이는 새로운 시장에 진지한 관심을 갖긴 힘들다.

셋째, 파괴적 혁신이 등장하는 시장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자료 자체가 없다. 성공적인 기존 기업의 강점 중 하나가 축적된 경험과 자료에 입각한 정교한 전략계획이다. 철저한 분석을 통해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새롭게 등장한 시장은 이들로선 도대체 이해가 어렵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더욱 힘들다.

넷째, 기업의 강점과 약점은 양면적 속성을 지닌다. 어느 한 측면에서 강하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는 약하다는 의미인데, 기존 성공적인 기업은 이제까지 해온 게임에서는 매우 강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새롭게 전개되는 게임에서는 결정적인 취약점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기술의 발전과 시장 수요의 변화는 다른 궤적을 그린다. 고객이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를 선택해 구매하는 요인을 보면 많은 경우 처음엔 새로운 기능에 끌리다가 점차 품질 등의 신뢰성과 편리성을 거쳐서 결국 가격으로 진화해나간다. 기존 성공적인 기업은 자신이 상당 기간 연마해온 (기존)기술을 더욱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하다 자칫 고객이 꼭 필요로 하지 않는 지나친 기술 중심의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게 된다.

고객 가치에 초점을 둔 파괴적 혁신자는 바로 이런 허점을 파고들게 되는 것이다. 종합해보면 성공적인 기업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환경 변화를 몰라서라기보다 알면서도 자기 변신을 막고 있는 일련의 관성적인 힘을 이겨내지 못해서다.

매우 드물지만 성공하는 기업이 자기 변신에 성공해 또 다른 성공을 일궈내는 사례가 있다. 100년이 넘도록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 GE, 듀폰, 지멘스, IBM 등은 놀라운 변신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결은 무엇인가. 다름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의 파괴적 혁신을 내부에서 시도하는 자기 부정과 극복이다. 이제까지 성공을 가져다준 자신의 방식을 과감하게 스스로 부정하고, 철저히 고객과 시장의 관점에서 변화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녹여내는 파괴적 혁신의 내재화를 해냄으로써 격변하는 세상의 흐름에서 새로운 성공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지독하리만큼 강한 조직의 관성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가 관건이다. 결국 내가 나를 파괴할 것인가 아니면 남에게 파괴당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한국 기업들, 파괴적 혁신의 주체에서 피해자로

지난 40여년에 걸쳐 이룩한 한국 기업의 놀라운 성공은 파괴적 혁신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전형적인 파괴적 혁신으로 글로벌 시장을 파고들어가 급속한 성장을 일궜다. 그런데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중국 기업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 저가의 짝퉁으로 취급받던 샤오미가 ‘가격 대비 성능’을 앞세워 돌풍을 일으킨 것이 파괴적 혁신의 대표적 사례다. 최근 중국의 푸젠진화반도체가 소위 ‘반도체 굴기’의 기치 아래 32나노급의 다소 저급한 D램 생산시설을 착공한 것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아성에 도전하는 파괴적 혁신의 조짐이다. 이런 일련의 중국 기업들의 약진을 단순히 저가제품의 공격으로 볼 것이 아니라 파괴적 혁신 관점에서 전략적 시사점을 생각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혁명적 변화로 인해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싸고 편리한 제품을 가능하게 하고 있고, 전통적 하드웨어 제품 위주의 한국 기업들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철저하게 시장과 고객을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자발적 변신을 해야 한다.

김동재 <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