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브렉시트 이유있다 2 - 제다이의 귀환
언제나 제국에 의한 평화였다. 제국은 이념을 주고, 속방은 받아들인다. 국제기구는 종종 칸트의 평화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유럽연합(EU)은 인위적 기구일 뿐 자생적 질서, 즉 칸트와 애덤 스미스의 시장의 평화는 아니다. 논란은 2004년의 EU 헌법으로 거슬러 간다. EU는 ‘초국가 EU 제국’을 창설하기에 이르렀고 국기를 만들고 국가까지 제정하는…,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자연의 제국’이 아닌 ‘인공의 제국’을 시도했다.

입법권은 위임됐고 EU는 법인격을 갖게 됐다. 제국을 지배하는 대통령 등 유사(pseudo) 국가기구가 창설됐다. 그러나 EU 제국을 창설하려는 이 시도는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 전면 거부됐다. 그리고 이번에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가 단행됐다. 16세기 헨리 8세의 로마 가톨릭 탈퇴, 네덜란드의 대(對)에스파냐 독립전쟁, 신성로마제국의 붕괴가 하나의 시간표라면 브렉시트는 그 연장선에 있다.

반(反)세계화, 고립주의라는 평가는 가당치 않다. 세계화는 ‘자유 교역을 통해 평화가 보장되는 질서’(칸트의 영구평화론)를 말하는 것이지 규제덩어리 인공의 제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양극화와 신자유주의에 지친 영국인들이 고립주의로 회귀한 것’으로 브렉시트를 해석하는 것 역시 억측이며 좌익적 재단이다. 영국인들이 영화 ‘스타워즈’에 그토록 열광했던 것도 제국연합에 항거하는 제다이 전사들의 투쟁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스타워즈는 브렉시트의 대중용 압축판이다.

브렉시트 진영에는 극우 나이절 패라지도 있지만 대니얼 해넌 같은 자유와 민주주의 전사도 있다. EU의 이민할당 규칙에 반대하지만 그것이 반이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넌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EU의 불개입주의 즉, 시리아와 중동 정책 실패가 이 지역 주민 모두를 난민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호무역주의를 걱정하는 것도 번지수가 틀렸다.

당연히 반자유적 규제론은 시험대에 설 것이다. 예를 들어 EU 시민이기만 하면 그의 자녀가 어디에 살든 자녀 복지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몽상적 규정이 그럴 것이다. 잊혀질 권리가 회복되고, 48시간 노동이 가능하며, 최저 15%인 에너지 부가세가 폐지되기를 영국인들은 바라고 있다. 2020년까지 전체 에너지의 20%를 신재생에너지로 충당해야 한다는 강제규정도, 같은 기간 동안 에너지 효율을 20% 올리고, CO2 20%를 감축해야 하는 조항도 철폐되기를 그들은 원하고 있다. 당뇨운전면허 제도가 폐지되고 휘어진 바나나를 팔면 안 된다는 바나나 미학 기준 같은 개그도 사라지기를 반EU주의자들은 바라고 있다.

데일리텔레그래프 칼럼니스트인 프레이저 넬슨은 27일자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브렉시트를 트럼프에 비교하는 것은 가장 큰 오해라며 영국은 보호무역과 이민 배척이 아니라 자유와 자유무역을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인에게는 독일인에게는 없는 내면의 자유와 반권위주의 기질이 있다”는 독일 슈피겔지 보도를 인용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고립’이라는 제목의 비판기사로 1면을 도배질했다. 그러나 EU로부터의 탈출일 뿐, 세계로부터의 고립은 아니다. 다른 EU 국가들도 브렉시트를 도모하고 있다. 퓨리서치에 따르면 EU에 대한 적대감은 그리스와 프랑스에서 가장 높다. 스웨덴 네덜란드, 심지어 독일에서조차 영국보다 반EU 감정이 높았다는 것이다.

사실 남유럽 부실을 만들어낸 도덕적 해이 시스템의 핵심은 독일이다. 독일은 자국 경제보다 저평가된 유로화를 기반으로 수출전략을 펴 왔다. 돼지들에게는 복지 독약을 먹이면서…. EU의 반CO2 투쟁 경과도 의심스럽다. 브뤼셀은 폭스바겐을 비롯한 독일 기업 로비스트들의 주된 활동 무대다. 캠페인은 결과적으로 디젤차 사기극을 만들었다. 태양광과 풍력도 그랬다. 이제 초국가 기구인 EU 자체가 시험대에 올랐다. 독일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EU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미 40년의 기득권이다. 그리고 자유를 두려워하는 세력이 너무 많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