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집무실에는 큰 지구본이 있다. 김 회장은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자원이 부족한 대신 바다가 있다”며 “해양산업을 키운다는 관점에서 조선과 해운업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집무실에는 큰 지구본이 있다. 김 회장은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자원이 부족한 대신 바다가 있다”며 “해양산업을 키운다는 관점에서 조선과 해운업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그는 해양수산부 설립을 위해 10여년간 공을 들였다. 1996년 해수부가 설립될 당시, 초대 해수부 장관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때부터 정부 쪽으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정부와의 인연을 배경으로 사업을 키웠다는 의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다. 기업인은 올곧게 경영하고 ‘숫자’(실적)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9년 배 한 척으로 참치 원양어업을 시작, 매출 4조원대 동원그룹으로 키운 김재철 회장 얘기다.

김 회장은 지난달 해수부 출범 20주년을 맞아 공무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면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에서 해양산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를 서울 양재동 동원산업 본사에서 만나 최근의 해양 관련 산업 위기에 대한 진단과 경영철학, 인재관 등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해운·조선업계가 어렵습니다.

“경쟁력을 갖추지 않고 정부 지원에 의존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1970년대 원양에서 참치를 잡는 회사와 중앙청에서 참치를 잡는 회사가 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지원을 받기 위해 정부 관료들만 찾아다니는 기업가가 많았다는 거죠. 중앙청에서 고기 잡던 회사는 지금 한 군데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정부 지원 없이 회복할 수 있을까요.

“기업들만 탓할 수는 없습니다. 정부 잘못도 크지요. 해운·조선산업의 특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일반 제조업과 같은 기준으로 부채비율 등을 따졌습니다. 해운업은 배값의 10%만 있으면 나머지는 빌려서 배를 건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부채비율이 높다고 기업을 들볶으니 배를 팔고 빌려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전후 컨테이너선 대형화라는 해운업계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수출입은행이 돈을 빌려줘 배를 건조한 회사는 한국 회사가 아니라 덴마크 머스크였습니다. 외국 기업은 키워주고, 한국 기업은 못 하게 하는 잘못을 저질렀지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까.

“전문가가 없는 게 문제예요. 관료들에게 적응기간을 주고 소신껏 일하게 해야 해요. 장관이나 국장을 1년에 몇 번씩 바꾸니 제대로 일을 못하는 겁니다. 또 항만 수산 조선 등을 관리하는 부서를 통합해 관리해야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옵니다. 해수부처럼 발언권 없는 부처가 아무리 얘기해도 말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통합부처가 필요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정부가 지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해운·조선회사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몸집을 줄이고, 일본처럼 특수목적회사를 세워 정부가 지원해 위기를 수습해야 합니다.”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이 오래 근무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사람을 쓰면 믿고, 못 믿으면 쓰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회사도 1년 정도 해서는 실무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 CEO가 오면 1년간은 조언은 하지만 질책은 하지 않습니다. 지금 동원산업 사장도 4년째 일하고 있고, 전임 사장은 8년 했습니다. 20~30년 근무한 사장도 있고요. 좋은 나무도 옮기면 버팀목을 세워주는데 새로운 사람을 단기적으로 평가하면 진가를 알 수 없지요.”

▷최근 2000번째 사내 강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1973년 이런 강의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한데요.

[월요인터뷰]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머스크, 돈 빌려 선단 불릴 때…우리는 빚 갚으라며 배 팔게 했다"
“1960년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나라의 발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도 저렇게 발전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43년 전 외부 강사를 초청해 목요세미나를 시작한 이유입니다. 직원들이 어업 관련 지식은 많지만 인문학 지식은 부족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강의를 듣고, 업무 능력 향상을 위한 어업, 회계 등도 배웠지요. 직원들이 대학 4년간 들은 수업보다 회사에서 배운 게 더 많을 겁니다.”

▷인재 양성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1979년 동원육영재단을 설립하고 장학사업을 시작했어요. 6000명이 넘는 학생이 동원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4년 전부터는 동원글로벌익스플로러라는 해외탐방 지원 프로그램도 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세계를 보고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서죠. 올해도 대학생 50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로 나갑니다. 6세 이하 어린이에게 1년간 책을 보내주는 ‘책꾸러기’도 중요한 사업 중 하나입니다. 매달 1만2000가구에 그림책을 지원하는데 100만권을 넘었습니다.”

▷안정적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왜요, 소문이 안 나 그렇지 동원도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카메라사업도, ‘삐삐’사업도 다 접었습니다. 밖에서 보기에 타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나름의 원칙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가장 잘될 경우와 가장 나쁜 경우를 모두 계산해봅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회사가 하는 주력사업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실행하지요. 아무것도 없을 때는 죽기 살기로 하면 되지만 기업이 성장하면 신중해야 합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영역을 놓고 다투는 것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동원의 원칙은 연안에서는 절대 고기를 잡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이 왜 여기서 어업을 하냐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지요. 대기업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때 절도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전문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소기업이 해야 할 것 같지만 전문성 부족으로 산업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경우 대기업이 진출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겁니다.”

▷젊을 때 참치 잘 잡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기업경영과 관련이 있습니까.

“참치를 잡을 때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고기가 올라오면 배를 갈라 뭘 먹었는지, 어디서 어떤 크기의 참치가 잡히는지 연구했습니다. 집중한 거지요. 요즘 강의하러 갈 때 볼록렌즈를 가지고 갑니다. 초점을 맞추면 불이 붙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거지요.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면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늘 어려운 길만 선택한 것 같습니다.

“어려운 길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편한 길로 갈 ‘힘’이 없었습니다. 편한 길에는 이미 머리 좋고, 집안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기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들어가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어려워요. 남들이 안 가는 곳에 가면 새로운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새로운 기회가 적다고 아쉬워하는데요.

“경제 상황이 어려운 것은 맞지만 기대치가 높은 것이 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어떻게 즐기며 살 것인가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취업한 사람들의 고용 조건보다 지금의 중소기업 조건이 훨씬 낫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영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 법을 어기지 않고 정도경영을 한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치와 거리를 둔 것이 제일 잘한 결정인 것 같아요. 국회의원, 장관 등 여러 제안이 있었지만 그때 정치를 했다면 피땀 흘려 이룬 회사가 오해를 받았을 테죠. 사업은 조용히 하고 결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잘난 체하고 떠드는 기업인이 아니라 열심히 산 기업인으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김재철 회장은…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동원그룹과 한국투자금융지주 창업자다. 23세이던 1958년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호 실습 항해사로 ‘바다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남태평양과 인도양에서 참치잡이 어선 선장과 선단장으로 활동하며 ‘캡틴 킴’으로 명성을 날렸다.

1969년 동원산업을 창업했고, 1982년 국내 최초 참치통조림인 ‘동원참치’를 선보였다. 같은 해 증권업에도 진출해 한국투자금융그룹을 일궜다. 2008년에는 젊은 시절 참치를 납품하던 미국 최대 참치통조림업체 스타키스트를 인수했다. 1999년부터 7년간 한국무역협회장을 지내면서 인사관행 타파 등 강도 높은 개혁을 했다. ‘2012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장을 맡아 박람회 유치에 큰 역할을 했다.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과 김남정 동원그룹 부회장 등 두 아들과 두 딸을 두고 있다.

△1935년 전남 강진 출생 △1958년 부산수산대 어로학과 졸업 △1969년 동원산업 창업 △1981년 하버드대 최고경영자과정 △1989년~(현) 동원그룹 회장 △1999~2006년 한국무역협회장 △200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