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모스크바 신 실크로드] '대륙횡단 지름길' 뚫었다…70일 걸리던 수출, 12일이면 끝
서방의 경제제재로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던 지난해 11월, 한국 물품을 러시아로 수입해 파는 A사는 황당한 일을 당했다. 루블화 가치 하락으로 높아진 수입 판매가를 부담스러워한 러시아 거래처가 거래를 취소하겠다고 한 것이다. 해당 상품은 한국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나 지중해를 건너오고 있었다. A사 관계자는 “물건을 한국으로 되돌리는 데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일단 러시아로 들여와 싼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삼성전자가 러시아 및 중국 정부에 제안해 이용하게 된 TMR(만주횡단철도)-TSR(시베리아횡단철도) 노선은 최대 70일까지 걸리던 모스크바까지의 운송기간을 12일까지 단축시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했다. 대륙 경제권에 다가서는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도 도움을 줄 전망이다. 서유럽까지 닿는 육상운송로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新)실크로드’라고 불린다.

◆각종 비용 절감 커

지난해 한국은 러시아에 47억달러어치를 수출하고 113억달러어치를 수입했다. 서방의 러시아 제재 등으로 2014년부터 교역 규모가 급격히 줄었지만 여전히 23위 수출 대상국이며 9위 수입대상국이다. 하지만 화물 운송은 서유럽까지 둘러서 가는 해운을 주로 이용하다 보니 물류상으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만큼이나 먼 지역으로 인식돼 왔다. 삼성전자 러시아 칼루가 생산법인에서 구매업무를 담당하는 김병국 과장은 “12월에서 1월 사이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항이 종종 얼어붙어 얼음 제거 작업을 하는 동안 화물선이 외항에서 며칠씩 대기하는 일도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러시아 법인에서 TV를 추가로 생산하기 위해 LCD(액정표시장치) 패널을 한국과 중국의 공장에 주문하면 이를 생산하는 데 7일이 걸린다. 해상 운송을 이용하면 주문한 LCD를 받는 데까지 2개월 이상이 걸린다. 하지만 이 기간이 3주 이하로 줄어들면서 더욱 쉽게 사업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다. 한국 회사의 러시아 법인 관계자는 “서방 제재 영향으로 달러당 루블화 가치가 2개월 사이에 반토막이 나기도 하는 상황에서 2개월의 기간으로는 판매전략을 수립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재고관리 비용이 줄어든다는 점도 중요하다. 물류업체 우진의 이강석 러시아 법인장은 “평균 이자비용을 연 2.8% 정도라고 보면 물류에 묶여 있는 상품값에 해당하는 이자비용을 50일 이상 아끼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러시아·중국 이해관계도 맞아

이 같은 경제적 이익은 러시아와 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진다.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제재를 겪으면서 아시아 지역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는 신동방정책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취임 이후 유럽으로 육상 교통로를 연결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외교 및 경제정책의 골간으로 삼고 있다. 당초 컨테이너당 8000달러가 넘던 운송료가 2700달러까지 줄어든 것은 두 나라 중앙정부가 TMR-TSR 노선 활성화에 적극 나선 결과다.

북한 핵실험 이후 진전되지 않고 있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정부는 유라시아 지역 28개국의 철도를 잇는 철도협력기구(OSJD) 가입을 추진했으나 기존 회원국인 북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북한 나진과 러시아 하산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도 대북 제재로 중단됐다. 엄구호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러시아와 중국의 경제에 더 접근한다는 점에서 북한과의 관계나 통일과 상관없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구도는 TMR-TSR 노선 활성화에도 도움을 줄 전망이다. 러시아 및 중국 측 관계자와 실무회의를 하고 있는 안윤순 삼성전자 칼루가 법인장은 “왕복물류를 활성화하는 등 운송료를 더 낮출 수 있는 방안에 러시아 및 중국 측 관계자가 더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