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크리스티 경매사가 작년 11월 실시한 ‘아시아 근현대 미술품 경매’에서 한국화가 김환기의 작품 ‘무제’를 입찰하고 있다. 한경DB
홍콩 크리스티 경매사가 작년 11월 실시한 ‘아시아 근현대 미술품 경매’에서 한국화가 김환기의 작품 ‘무제’를 입찰하고 있다. 한경DB
중국의 금융재벌 류이첸 선라인그룹 회장과 그의 부인 왕웨이는 현대미술품 수집광이다. 상하이에 롱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들은 지난해 6월 홍콩크리스티 경매에서 김환기의 1950년대 작품 ‘푸른산’을 40여차례 경합 끝에 1384만홍콩달러(약 19억7995만원·수수료 포함)에 낙찰받았다. 미국 할리우드 액션스타 실베스터 스탤론은 작년 12월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 바젤 마이애미비치’에서 한지작가 전광영 화백(71)의 근작 ‘스타’와 ‘집합’ 등 2점을 29만달러(약 3억4000만원)에 사들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해외 미술 애호가들이 국내 유명 화가의 그림을 잇달아 사들이면서 미술 한류의 새로운 ‘바잉 파워’로 뜨고 있다.

외국인, 한국그림 보유 비중 늘려

최근 미술계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지난 3~4월 서울옥션과 K옥션이 잇달아 연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 백남준 이우환 정상화 박서보 하종현 등 국내 인기 작가의 작품 80억원어치를 사들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두 회사의 낙찰총액 229억원(서울옥션 141억원·K옥션 88억원)의 약 35%다. 단색화 열풍 이후 한국 그림에 대한 외국인 보유 비중이 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외국인, 올 홍콩경매서 80억원대 '베팅'
지난해에도 외국인 컬렉터들은 홍콩크리스티 한국지사와 서울옥션, K옥션의 홍콩 경매에서 전체 낙찰총액(전체 경매시장 981억원)의 30%가 넘는 300억원어치가량의 한국 그림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외국인들이 국내외 아트페어나 서울 경매시장에서 전화나 서면 입찰을 통해 간헐적으로 한국 미술품을 구입한 것과는 크게 달라진 양상이다.

이상규 K옥션 대표는 “해외 컬렉터와 투자자들은 한국 미술품 가격이 경제 규모에 비해 저평가됐다고 판단, 이우환 정상화 박서보 등 단색화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구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표적 ‘투자 사냥감’은 단색화

그동안 백남준 전광영 김창열 홍경택 최소영 등의 작품에 집중 투자하던 외국인들이 최근에는 김환기 이우환 정상화 박서보 하종현 윤형근 등 단색화가 작품을 투자 ‘사냥감’으로 여기고 있다. 익명의 홍콩인 투자자는 지난달 4일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의 점화 ‘무제’를 3300만홍콩달러(약 48억6750만원)에 베팅해 국내 미술품 최고가를 다시 썼다.

또 다른 외국인은 2013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이우환의 1976년작 ‘선으로부터’를 23억원에 사들였고, 유럽 지역 컬렉터는 지난 2월 런던 화이트큐브에서 열린 박서보의 개인전 출품작 16점을 전시 개막 전 모두 사들여 화제를 모았다.

한국미술품에 대한 이들의 ‘식욕’은 국내 작가의 경매 최고가를 줄줄이 쏟아냈다. 홍경택의 작품 ‘연필1’이 9억6000만원에 팔린 것을 비롯해 백남준의 ‘라이트형제’(7억원), 오치균의 1998년작 ‘사북의 겨울’(6억원), 김동유의 ‘마릴린 먼로& 마오 주석’(3억2000만원), 강형구의 ‘워홀 테스트 II’(3억원) 등이 홍콩 경매시장에서 신기록을 세웠다.

◆K옥션, 6~8일 뉴욕서 단색화 전시

외국인들이 한국 미술 투자에 열을 올리자 서울옥션과 K옥션은 매년 두 차례 열던 홍콩 경매를 4회로 늘리기로 했다. 두 경매회사는 오는 29일 나란히 두 번째 세일 행사를 치른다.

또 K옥션은 오는 6~8일 미국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호텔에서 ‘한국의 추상화’ 전을 열고 뉴욕 미술 애호가의 한국 미술품 구매력을 점검할 예정이다. 서울옥션 역시 9일 이호재 회장의 뉴욕을 방문을 계기로 미국 시장을 점검한 뒤 진출 여부를 결론내릴 방침이다.

이처럼 일부 국내 작가의 작품이 유럽과 아시아 컬렉터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자금력을 앞세운 해외 컬렉터들이 매입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컬렉터들이 이우환 천경자 작품 위작 논란으로 관망세를 보이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장기적으로 한국 미술품 가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달러화 약세와 최근의 안전자산 선호 분위기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옥경 서울옥션 대표는 “국내 경매에서 유럽, 아시아 고객의 경합이 이어진 것은 해외 컬렉터들이 국내 미술 경매시장에서 매수자의 한 축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 프랑수아 피노 회장·앨튼 존 등 한국미술에 큰 관심

김환기의 ‘푸른산’을 소장품 도록의 표지로 활용한 왕웨이 롱미술관장.
김환기의 ‘푸른산’을 소장품 도록의 표지로 활용한 왕웨이 롱미술관장.
외국인 미술 애호가의 한국 미술품 수집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미술품을 사려는 컬렉터들이 아시아에서 미국, 유럽, 중동 신흥부자와 중산층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술 한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구찌, 알렉산더 맥퀸, 스텔라 매카트니 등 명품 브랜드를 보유한 PPR(피노프랭탕르두트)그룹의 프랑수아 피노 회장은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이우환의 그림을 갖고 있다. 상하이 금융재벌 류이첸 역시 대표적인 한국 미술품 애호가로 김환기와 이우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상하이에 이어 충칭에도 미술관 설립을 검토하고 있는 만큼 한국 미술품 추가 구입이 예상된다.

가수 앨튼 존은 사진작가 배병우의 ‘소나무’ 시리즈를 소장하고 있고, 조지 웡 인도네시아 파크뷰그린그룹 회장과 대만 정보기술(IT)기업인 인벤텍 베스타의 빌 청 대표도 김환기 김창열 이우환 권기수 최소영 김덕용 전광영 등 한국적인 미감이 돋보이는 작가의 작품을 여러 점 보유하고 있다. 중국의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 쉬자인 헝다그룹 회장도 한국 미술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컬렉터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