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의 최길선 회장과 권오갑 사장은 창립 44주년을 하루 앞둔 22일 한국 조선업계의 위기를 고백했다. 조선소가 보유한 일감을 의미하는 수주 잔량이 11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 도크(선박 건조시설)가 비는 일이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내용이다.

도크가 빈다는 것은 할 일이 없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세계 시장을 주도하던 세계 최대 조선사의 최고경영진이 ‘생존’을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 회장과 권 사장은 “정신 차리고 힘을 모아 회사를 다시 살려야 한다”며 “생존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벼랑 끝 내몰린 조선업] 현대중공업 CEO "수주 씨마르고 돈줄도 막혀…이젠 생존이 문제"
◆생존 걱정하는 조선사 최고경영진

최 회장과 권 사장은 “지난 10여년간 회사는 너무 비대해졌고 세상의 변화에 둔감했다”고 털어놨다. “이제 잘하는 것처럼 꾸미지도 말고, 돌아가거나 회피하지도 말자”고 했다.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 어려운 고비를 힘을 합쳐 넘어가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들이 털어놓은 것은 여러 가지다. 당장 도크가 비고 있다고 인정했다. 품질이 좋지 않아 선주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다고 했다. 과잉 수주와 적자 수주의 후유증이 지금도 발목을 잡고 있다고 털어놨다. 선주들의 계약 취소로 자금 사정이 만만치 않으며, 금융권에서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일감은 줄고 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려 해 ‘생존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회사의 체질을 바꾸는 데 모든 것을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구체적으론 “돌아가면서 상을 받는 포상제도를 대폭 개선하고, 호황기에 만든 지나친 제도와 노사 협상 사항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사업본부 대표에게 보다 강력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 각 사업본부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노동조합의 행태도 지적했다. 삼성중공업 노동자협의회가 선주사를 상대로 직접 수주 활동을 벌이고 대우조선 노조가 채권단에 쟁의활동 자제와 임금 동결에 동의한 사실을 거론하며 “일감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두 회사의 모습인데, 우리는 어떤가”라고 반문했다. 이들은 “일감이 없어 어떻게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전환배치를 시행했지만 노조는 회사에 대한 비난에 앞장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빅3’ 수주량 작년의 5%에 불과

현대중공업만이 아니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도 마찬가지다. 정성립 대우조선 사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조선산업이 중국과 일본 등 경쟁 국가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고, 내 할 일만 하면 끝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데 이를 바꾸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도 지난 18일 주주총회에서 “생존을 위해 근본적인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 ‘빅3’ 최고경영진이 생존을 거론할 정도로 조선산업은 위기다. 지난해 빅3는 8조3156억원의 적자를 냈다. 개선될 기미도 없다. 수주량은 갈수록 줄고 있다. 올 들어 한국 조선업계는 8만5700CGT를 수주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같은 기간(165만CGT)의 5% 수준이다. 수주 잔량도 2844만CGT로 떨어졌다. 최고였던 2008년 8월(7140만CGT)과 비교하면 40% 수준에 불과하다.

해양플랜트 수주는 지난해부터 뚝 끊겼다. 국제 유가가 곤두박질치면서 오일 메이저들이 심해(深海)에서 원유를 채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해양플랜트 발주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빅3 가운데 삼성중공업만 지난해 두 건의 해양플랜트 사업을 따냈을 뿐,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은 한 건의 수주도 기록하지 못했다.

당장 수주량을 회복할 가능성도 크지 않다. 한 대형 조선사 관계자는 “현재 계약이 임박한 물량이 많지 않다”며 “통상 3~6월이 수주 성수기로 분류되는데, 올해는 수주 가뭄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