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에서는 1999년부터 다시 좌파 정부가 줄줄이 들어섰다. 빈부 격차 해소를 내세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그해 인구 80%에 이르는 빈곤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이후 2002년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2003년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2004년 우루과이의 타바레 바스케스, 2005년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와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등 좌파 정당 출신 대통령이 잇달아 선출됐다. 그 결과 남미 12개국 가운데 콜롬비아와 파라과이를 뺀 10개국에 좌파정부가 들어섰다. 이른바 ‘분홍 물결(pink tide)’이다. ‘붉은 물결(공산주의)’보다는 온건한 사회주의 경향 정부가 집권했다는 점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남미의 ‘분홍 물결’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 주된 원인이었다. 남미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신자유주의정책을 따랐다. 1982년 남미 외환위기 때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남미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주도한 ‘워싱턴 컨센서스’를 받아들였다. 민영화와 시장 개방이 주요 내용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메넴 정부 등 남미 각국 정부는 1990년대 탈(脫)규제, 복지 감축, 공무원 축소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남미에선 신자유주의 때문에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경제가 미국 의존적으로 바뀐다는 비판이 일었다. 1960~1970년대 남미에서 주목받았던 ‘종속이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남미 국가들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미국 등 선진국의 착취로 설명한 이론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반미(反美)’를 내세워 좌파 공조를 외쳤다.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원유를 팔아 번 돈으로 남미 각국 좌파 정부를 지원했다.

그러나 무상의료 등 나눠주기에 급급하던 차베스의 ‘볼리바르혁명’(19세기 초 남미의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시몬 볼리바르의 이상을 사회주의적으로 계승한 운동)은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차베스가 2013년 사망하면서 볼리바르혁명은 미완에 그쳤고, 그가 몰고 온 ‘분홍 물결’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