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적십자 정신과 글로벌 시민의식
1859년 스위스 제네바의 사업가였던 앙리 뒤낭은 여행 중에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솔페리노에 도착했다. 당시 그곳은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격전지였다. 그는 그곳에서 한나절 만에 30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치는 현장을 목격했다. 특히 부상당한 병사들은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뒤낭은 자신이 여행자란 걸 잊은 채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부상병을 위한 구호활동을 펼쳤다. 사재를 털어 작은 교회에서 치료를 시작했고, 생명을 살리기엔 이미 늦어 사경을 헤매는 군인들이 평온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그들이 가족에게 전할 마지막 유언을 편지에 적어 전해줬다. 그는 이때의 기억을 담아 《솔페리노의 회상(Memory of Solferino)》이란 책을 출간했다. 이 저서는 유럽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뒤낭과 제네바의 명망 있는 인사 5명이 모여 1863년 전시부상자구호위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국제적십자운동의 뿌리가 됐다.

1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국제적십자운동이 지속, 발전해 올 수 있었던 밑바탕엔 일곱 개의 국제적십자운동 기본원칙이 있다. 인간존중 정신을 강조하는 ‘인도(humanity)’, 국적과 종교 및 계급 차별이 없는 ‘공평(impartiality)’,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neutrality)’, 자국의 법규를 준수하지만 어느 때든 국제규범을 기준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율성이 보장된 ‘독립(independence)’, 이득을 추구하지 않는 ‘순수한 봉사(voluntary service)’, 한 나라엔 하나의 적십자사만이 있다는 ‘단일(unity)’, 특정 지역과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적십자사가 동등한 책임과 의무를 지는 ‘보편(universality)’이 그것이다.

한국은 현재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있다. 남북 분단도 모자라 동과 서,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남과 여, 세대로 나뉘어 비생산적인 갈등만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런 분열을 봉합하는 힘은 모두가 글로벌 시민의식으로 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툼이 아닌 배려와 포용, 아집이 아닌 보편성에 대한 지향, 갈등이 아닌 통합, 미움이 아닌 인간존중을 바탕에 둔 사랑의 정신은 우리가 이 갈등의 시대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열쇠다.

김성주 < 대한적십자사 총재 kimsungjoo@redcross.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