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은행나무
‘동방에서 건너와 내 정원에 뿌리내린/ 이 나뭇잎엔/ 비밀스런 의미가 담겨 있어/ 그 뜻을 아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오.// 둘로 나누어진 이 잎은/ 본래 한 몸인가?/ 아니면 서로 어우러진 두 존재를/ 우리가 하나로 알고 있는 걸까?// 이런 의문에 답을 찾다/ 비로소 참뜻을 알게 되었으니/ 그대 내 노래에서 느끼지 않는가/ 내가 하나이며 또 둘인 것을.’(괴테 시 ‘은행나무 잎’ 전문)

괴테의 ‘서동시집’에 나오는 시구처럼 은행나무의 고향은 중국이다. 일본을 거쳐 유럽까지 퍼진 시기는 18세기로 알려져 있다. 한자로 은행(銀杏)은 ‘은빛 살구’를 의미한다. 열매가 살구를 닮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1종 1속만 있고,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식물이어서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쓰임새도 다양하다. 목재의 결이 곱고 치밀해서 가구, 조각, 바둑판 등에 많이 쓰인다. 정자목(亭子木)·풍치목·가로수로도 사랑받는다. 은행잎에서 추출한 징코플라본글리코사이드는 혈액순환 개선제로 쓴다. 다만 은행 씨에는 유해성분이 있어 많이 먹으면 해롭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딴 그루다. 수나무에서 날아온 꽃가루를 받아야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수십년 자란 암나무에만 열리기 때문에 어린 묘목으로는 암수 구별이 어렵다. 가을철 악취 공해는 그걸 모르고 암나무를 심은 탓이다. 다행히 2011년 산림과학원이 수나무 유전자를 발견해 어릴 때부터 암수 감별이 가능해졌다. 농가에는 암나무, 도심에는 수나무만 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울시는 도심의 암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수나무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인기를 끄는 것은 뛰어난 생명력과 공기정화 효과, 가을마다 노랗게 물드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요즘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 삼청동 은행나무길, 신사동 가로수길은 노란 은행잎 물결로 일렁인다. 올해는 강수량이 적고 일교차가 커 빛깔이 더 곱다. 양평 용문사의 1100년 된 은행나무, 경북 안동의 700살 넘은 은행나무, 영주 부석사의 아름드리 은행숲, 충남 보령의 청라 은행마을, 아산 현충사 은행나무길, 강원 홍천 은행나무숲길도 명소다. 남이섬의 안개 속에서 보는 은행숲길 또한 환상적이다.

곽재구 시인은 은행잎을 ‘보도 위에 쓰는 아름다운 연서’라고 노래했다. 노란 바탕에 사랑의 밀어를 한 자씩 적어 내려가는 이의 표정은 얼마나 행복할까. 시와 함께 은행잎 두 장을 편지에 붙여 보낸 괴테의 마음도 그랬으리라.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