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TPP시대 지각생 한국, 통상정책 기초부터 다시 짜야
한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서 빠진 것에 대해 대부분 해외 전문가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세계 최대 경제통합체가 자기 안마당인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탄생했는데, 대외무역 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통상대국이 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뭐가 문제였을까. 첫째, 정부가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이란 비교적 손쉬운 정치적 전리품 위주로 챙겨온 태도부터 문제다. 2010년 말레이시아가, 2011년 말 캐나다와 멕시코가 TPP 협상에 참여함과 동시에 일본이 협상 참여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보고도 당시 통상교섭권을 갖고 있던 외교부 통상교섭본부는 TPP 참여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정부가 TPP 참여 관심 표명이라도 하면 농민들 반발이 가중돼 한·미 FTA 비준 과정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나, 그만큼 당장의 전투에서 승리를 위해 TPP의 전략적 가치를 과소평가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뉴스의 맥] TPP시대 지각생 한국, 통상정책 기초부터 다시 짜야
2013년 3월 통상교섭본부가 폐지되고 그 기능을 이어받은 산업통상자원부는 더더욱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했다. 2013년 7월 일본이 TPP 협상에 공식 참여했는데도 우리는 11월에 가서야 협상 참여 관심을 표명했다. 호주, 캐나다, 중국, 뉴질랜드, 터키와의 FTA 협상을 연쇄적으로 타결하면서 국민들이 ‘경제영토 확대, 동시다발적 FTA, 세계 최대의 FTA 허브국가’라는 캐치프레이즈에 환호하도록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글로벌 경제의 통합 환경은 놓쳤다. 그 사이 국제경제 체제는 패러다임을 전환해 우리 경제를 광역경제통합 시대의 지각생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많은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전쟁에 패배하는 형국에 놓여 있는 것이다.

둘째, 대미 통상협상 전략의 부재 또한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우리의 TPP 참여 관심 표명에 대해 미국은 2013년 말과 2014년 초에 걸쳐 한국의 협상 참여 선결조건으로 ‘한·미 FTA의 완전한 이행’을 요구했다. 미국 측이 요구한 것은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 도입 중단, 미국산 오렌지주스 원산지 검증 완화, 금융정보 해외 이전 허용, 유기농 제품 상호인증 등의 4대 선결조건이었다.

협상 참여 골든타임 놓쳐

이에 정부는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 시행을 2020년까지 유예했고, 미국 농무부가 발행하는 품질보증서를 원산지 입증 서류 하나로 인정해줬으며, 일부 민감정보를 제외한 금융정보의 해외 이전을 허용했다. 유기농 제품에 대한 한·미 상호인증 제도는 2014년 7월부터 시행했다.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는 필수 환경주권에 관한 사항이라 한·미 FTA에서도 예외로 허용한 환경보호 조치에 해당한다. 한·미 FTA에서 채택하고 있는 원산지 검증 방식은 직접 검증이기에 미 농무부가 발행하는 품질보증서를 원산지 입증자료로 인정해주는 것은 한·미 FTA 이행 차원을 넘어 미국 측에 유리하게 협정을 개정해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도 2014년 12월 산업부 장관이 방미해 미 무역대표부(USTR)로부터 받아낸 답변은 “TPP가 출범하면 나중에 가입을 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미 FTA에서 합의하지 않은 사항들까지 정부가 자발적으로 양보하고 나중에 TPP 가입을 위한 대미 협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협상카드를 소진해 버리면서까지 얻어낸 것이 고작 그것이었다.

셋째, 학계와 싱크탱크들 또한 TPP와 같은 광역FTA의 진정한 혜택을 종합평가하는 시각을 갖지 못했다. 2013년 말 열린 1차 TPP 공청회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이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TPP의 국내총생산(GDP) 증대와 산업피해 영향만을 공방하는 데 그쳤다. 찬성론은 TPP 참여로 아·태지역 국가들과 경제분업 구조를 형성하고 우리가 FTA를 체결하지 못한 국가들과 연결하게 돼 GDP가 2.5%가량 증가함을 내세웠다. 반대론은 GDP 증가분이 0.2% 정도에 그치고 농업과 제조업 분야의 피해가 크다고 강조하며, TPP 발효 후 가입할 수도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TPP는 사실상 일본과 FTA 관계를 수립하자는 것인데, 대일 무역역조 현상이 가속화된다는 논리도 들렸다.

광역FTA 시대에서는 FTA정책을 보는 패러다임이 변화해야 한다. TPP는 상품 및 서비스 분야의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개방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혜택을 가입국에 장기적으로 부여한다. 외교안보적 시너지 효과가 발생함은 물론 투자, 지식재산권, 경쟁, 노동, 환경, 무역구제, 중소기업, 국영기업, 원산지 규정 등의 교역규범 측면에서 12개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규제 원칙들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거래비용 감소 효과도 간과

12개국이 각각 양자 FTA를 맺을 경우 총 66개의 양자 교역규범이 필요한데 TPP는 공통된 규범을 적용한다. 원산지 규정을 예로 들면 회원국 기업이 66개의 상이한 품목별 원산지 규정을 놓고 씨름할 필요 없이 하나의 원산지 요건에만 맞춰 원료를 조달하고 생산하면 특혜 관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역내에서 조달한 원료라면 자국에서 조달한 것처럼 취급하는 규정도 도입했으므로 역내 재료공급망도 활성화하게 된다. 결국 규범의 통합은 기업의 거래비용 감소는 물론 투명성 증대와 규제 간소화로 이어져 통상행정 비용도 급격히 줄인다.

TPP가 탄생하면 그때 가입하면 된다는 논리도 그렇다. 쌀을 예로 들면, 이미 미국과 일본이 협상한 TPP 모댈리티(modality·상품양허 협상지침)대로 미국, 베트남 등 쌀 수출국들에 의무수입(TRQ) 물량을 추가로 제공해주는 대가로 관세철폐 제외 품목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애초 우리가 TPP 협상에 참여했더라면 일본과 공동전선을 펼쳐 쌀 관련 모댈리티를 좀 더 유리하게 수립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밖에 원(元)회원국에 비해 후속 가입국이 치러야 할 대가가 혹독할 것임이 자명하기에 미국 일본 뉴질랜드 등이 제시할 요구 보따리가 벌써부터 걱정된다.

통상이 국내정치에 종속돼선 안돼

정부는 TPP 문안이 공개되면 그 득실을 따져 참여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다. TPP가 발효될 것으로 예상되는 2017년 이후에 가입 준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한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국내 정치의 종속변수로 전락해버린 통상정책의 독립성을 회복해야 한다. 마비된 통상정책 점검 메커니즘을 재가동해 전체 통상정책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세계의 큰 흐름을 분석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문화도 공직사회에 형성시켜야 한다. 정부의 싱크탱크 연구소들은 그 기능적 독립성을 유지시켜 창의적 정책 수립과 비판 기능을 수행토록 해야 한다.

최원목 <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