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경영상] 서경배 회장, 중국 넘어 미국·유럽까지 영토 확장…'K뷰티 신화' 주역
“회사의 70년을 가능하게 해준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글로벌 챔피언 브랜드 선물을 드립니다. 아름다운 오늘을 지나 더 아름다워질 미래를 계속해서 함께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모레퍼시픽이 창립 70돌을 맞은 지난 9월5일. 회사 임직원 1만3000여명은 서경배 회장에게서 특별한 선물상자를 받았다. 상자에는 이 회사의 5대 주력 브랜드인 설화수 라네즈 마몽드 이니스프리 에뛰드 제품과 함께 서 회장의 감사편지가 담겨 있었다. 얼핏 보면 ‘직원들에게 자사 제품을 선물하는 게 특별한 일일까’ 싶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70주년을 맞은 서 회장의 각오를 읽을 수 있다.

서 회장은 “회사 성장을 견인할 ‘글로벌 브랜드’의 의미를 전 직원이 공유하자”는 뜻에서 제품 결정부터 선물상자 디자인까지 손수 챙겼다.

아모레퍼시픽은 전신인 태평양이 설립된 1945년 이후 국내 시장점유율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화장품 명가’다. 서 회장은 요즘 국내 정상을 넘어 세계 시장을 향한 ‘글로벌 도전’에 고삐를 죄고 있다. 최근 고속 성장을 거듭해 온 중화권을 넘어 미국, 유럽에 이어 내년부터는 한국 화장품업계의 불모지대인 중동, 중남미 시장에도 진출한다. 중국에서 다진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미개척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적극 나서겠다는 구상이다.

“세계를 기준으로 하면 아모레는 아직 작은 회사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아시아 뷰티를 세계문화 중심에 우뚝 세우는 겁니다. 다만 인수합병(M&A) 같은 쉬운 방식은 쓰지 않을 겁니다. ‘우리만이 만들 수 있는 제품’으로 서양의 화장품 기업과는 다른 길을 가겠습니다.”

국내 최초의 한방 화장품 설화수, 제주 천연 원료를 전면에 내세운 이니스프리,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 유형의 화장품으로 개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쿠션 등과 같이 독창적인 제품으로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은 해외 사업을 공격적으로 키워 2020년 매출 12조원, 해외 매출 비중 50% 이상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매출이 4조7119억원, 해외 매출 비중이 18%(8325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만만치 않은 목표다. 서 회장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던 미국에서도 작년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며 “여러 국가와의 유통채널에 도전하고 혁신해야 100년 가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화장품업계에서는 아모레퍼시픽의 성공 비결로 ‘한우물’을 파면서 연구개발(R&D)에 아낌없이 투자한 서 회장의 뚝심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최근 ‘대박’을 터뜨린 중국 사업 역시 처음 진출한 건 1992년이었지만 15년 만인 2007년에야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현지 의약대학 등과 손잡고 중국 여성 5200여명의 피부 특성을 연구하는 등 R&D 투자에 주력했다.

서 회장은 보통 1년의 3분의 1은 해외 출장, 3분의 1은 국내 출장을 갈 정도로 ‘현장 경영’을 중시한다. 직원들을 중남미, 중동 등으로 보내 신흥시장 조사와 재충전의 기회로 활용하도록 하는 ‘혜초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여성친화적인 근무환경 덕에 여대생들로부터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이 회사 직원들은 사무실 안에서든 밖에서든 서 회장을 ‘회장님’ 대신 ‘서경배님’이라고 부른다. 수평적 기업문화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경영철학 중 하나다.

요즘 가장 ‘잘나가는’ 회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아모레퍼시픽이지만, 좋은 시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 회장은 1991년 공권력까지 투입된 장기파업 사태 때는 “회사가 정말 망하는 줄 알았다”며 “화장품 시장도 개방된 상황에서 대응이 미숙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1990년대 비주력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아이오페, 헤라 등 야심차게 준비한 신규 브랜드가 인기를 얻으면서 회사 상황은 안정을 되찾았다. “여러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난 뒤 선대 회장님(고 서성환 창업회장)이 기뻐하셨던 게 저로서는 회사에 몸담은 이후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입니다.”

서 회장은 아모레퍼시픽에서 나오는 모든 신제품을 직접 써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화장품사업이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화장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몸가짐이 변하면 마음이 바뀌고, 마음가짐이 변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와 위상이 바뀌죠.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답게 변하면 사회가 바뀌고 세상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서경배 회장은…
90년대 비주력 사업 구조조정 주도…외환위기 고비 넘겨
화장품 집중 성장전략…글로벌 회사로 키워


서경배 회장은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인 태평양을 창업한 고(故) 서성환 창업회장의 차남이다. 연세대 경영학과와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1987년 태평양 경영관리실 과장으로 입사했다.

서 창업회장은 1989년 4월 군에서 갓 제대한 차남에게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지시한 뒤 100억원을 투입하는 장항 신공장 건립, 지지부진한 프랑스 사업의 개선 방안 등 버거운 과제를 잇따라 맡겼다. 서 회장은 밤낮도 휴일도 없이 매달리며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단련된 역량은 그가 훗날 최고경영자(CEO)에 오르고 나서 빛을 발했다.

서 회장은 1990년대 비(非)주력사업을 모두 매각하는 태평양그룹의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태평양그룹은 화장품 외에 건설 증권 패션 스포츠구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1994년 태평양 기획조정실 사장을 맡은 그는 부친과 함께 “미(美)와 건강에 관련 없는 사업은 전부 정리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그 원칙대로 다른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화장품에 집중하는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일찌감치 ‘군살 빼기’에 나선 덕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의 연쇄 부도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큰 화를 면했다.

서 회장은 2006년에는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마무리해 경영능력을 인정받았으며, 2013년 회장에 올랐다. 2003년부터 12년째 대한화장품협회 회장을 맡으며 화장품업계 안팎을 잇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다.

해외 사업 성과에 대한 기대로 지난해부터 아모레퍼시픽 주가가 고공행진을 거듭하면서 서 회장의 주식가치 역시 큰 화제를 모았다. 서 회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에 이어 국내 주식부자 2위에 올라 있다. 그는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회사 가치가 올라간 데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고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사회 발전에 기여할 방안을 깊이 고민하는 중이며, 정리되는 대로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서 회장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를 꼽는다. 그의 ‘보물 1호’는 부친인 서 창업회장의 생전 여권이다. 1960년대부터 세계 곳곳을 돌며 한국 화장품의 글로벌화를 꿈꿨던 부친의 여정이 이 여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서경배 회장 프로필

△1963년 서울 출생 △1985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87년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 졸업 △1987년 태평양 입사 △1997년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2003년~ 대한화장품협회 회장 △2013년 아모레퍼시픽그룹 대표이사 회장 △2014년~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