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테헤란로
서울의 무수한 도로 중 유일하게 외국 수도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 바로 테헤란로다. 강남역에서 삼성역까지 고작 4㎞ 도로지만 한국 경제의 중핵과도 같은 지역이다. 주변 삼성동 역삼동 대치동은 이른바 강남의 대명사다. 70년대 초만 해도 자갈밭이던 곳이 상전벽해한 것이다.

테헤란로의 역사는 채 50년이 안 된다. 조선시대엔 길이 있으되 이름은 없던 곳이다. 1972년에야 서울시가 삼릉로(三陵路)라고 명명했다. 인근 선릉(성종과 정현왕후 묘)과 정릉(중종의 묘)의 봉분이 셋이어서 생긴 삼릉공원에서 유래했다.

테헤란로라는 이름은 1977년 6월 서울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자매결연 때 서로 가로명을 교환키로 합의한 결과다. 테헤란 도심엔 서울로가 있다. 하지만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양국 관계가 멀어지면서 80년대 초 신문 독자투고란엔 도로명 변경 요구가 이어졌다. 1992년 강남구 의회에선 강남 중심도로에 외국 수도이름이 웬 말이냐는 공개 질의까지 나왔다. 급기야 주한 이란대사관은 양국 우호의 상징이라며 개명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다.

테헤란로의 성장은 1970년대 후반 영동 개발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시는 테헤란로 일대를 영등포 잠실과 함께 3대 부도심으로 삼고 경제금융의 중심지로 육성한 것이다. 왕복 10차로의 탁 트인 도로 양편에 고층빌딩이 즐비해 영화 촬영의 단골무대다. 영화 ‘어벤저스’나 ‘감시자들’의 차량 추격신도 여기서 찍었다.

90년대 후반엔 ‘테헤란밸리’로도 각광받았다. 벤처의 메카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인텔리전트 빌딩에다 초고속 광통신망이 깔렸고 주변에 오피스텔이 대거 들어서 최적의 입지를 이룬 덕이다. 통신회사들과 IT기업들이 앞다퉈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늘도 있었다. 1983년 ‘영동사건’ 등 개발 비리가 속출했고 돈이 넘쳐나면서 기업보다 룸살롱 모텔이 더 빨리 늘어나기도 했다. 외환위기와 벤처 거품붕괴로 테헤란로 입주 기업들이 대거 몰락해 한때 ‘데스 밸리’란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대기업 본사가 옮겨오고 금융회사 강남센터가 자리잡으면서 비즈니스와 스타트업의 요람으로 부활했다.

이란의 핵협상 타결로 인구 8000만명의 산유국 이란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란은 경제제재를 받으면서도 한국과의 교역액이 연 100억달러에 이르렀다. 2002년 양국 수교 40주년을 맞아 테헤란에 서울공원을 만들고 ‘대장금’ 시청률이 90%에 달했던 나라다. 이란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테헤란로를 보면 참 반가워할 것 같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