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수의 자본시장 25시 ⑦] 구글의 혁신과 성장 … 숨은 공신은 차등의결권
[최명수의 자본시장 25시] 랑콤, 조지오 아르마니, 기라로슈, 비오템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화장품 그룹 로레알(L‘Oreal). 이 회사는 2년 이상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에게 배당금을 최대 10% 더 얹어준다. 전력회사 일렉트리시테 드 프랑스(Electricite de France)와 금융그룹 크레디 아그리콜(Credit Agricole)도 장기 보유 주주에게 이익배당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테팔 프라이팬 등을 소유한 그룹 세브(Groupe SEB) 역시 장기 투자자 배당 가산제를 운영 중이다. 1999년 유럽 최대 시멘트 업체인 라빠르지(Lafarge)가 이 제도를 처음 도입한 이후 프랑스에선 주식을 오래 갖고 있는 투자자에게 인센티브를 활발하게 제공하고 있다.

프랑스 기업의 장기 투자 인센티브에는 배당뿐 아니라 의결권 추가도 포함된다. 지난해 3월 통과한 플로랑주법(Florange Act)에 따라 상장 주식을 2년 이상 보유한 모든 주주는 2배의 의결권을 자동적으로 받는다. 2016년 3월부터 시행되는 이 법은 이른바 ’테뉴어 보팅(tenure voting)제‘로 불린다. 프랑스 증권시장을 대표하는 120개사(SBF 120 기업) 가운데 정관에 테뉴어 보팅을 규정하고 있는 기업은 70개가 넘는다. 이 제도는 ’1주 1의결권‘을 원칙으로 삼으면서도 예외적으로 주식 보유기간에 따라 의결권을 추가한다. 주식을 발행할 때부터 보통주를 A클래스(1주 1표)와 B클래스(1주 10표)로 나눈 구글의 차등의결권주(dual class stock)와 약간 다르지만 '의결권 차등화'라는 결과는 똑같다.

◈구글, 복수의결권주 발행해 창업주 63% 의결권 확보

구글은 ’장기 투자 유인‘보다는 ’혁신을 위한 경영 안정‘ 목적으로 차등의결권주를 도입했다. 2004년 미국 나스닥에 기업공개(IPO)를 할 때 창업자에게는 B클래스, 일반인에게는 A클래스 주식을 발행했다. 창업자들은 주주들에게 편지를 통해 “경영권 위협없이 장기적이고 혁신적인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 결과 래리 페이지(28.4%)와 세르게이 브린(27.7%), 에릭 슈미트(7.6%) 등 구글 창업·경영자들의 의결권은 총 63.7%(2013년 4월)에 이르렀다. 경영권을 위협받지 않고 분기나 반기 성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상장 당시 목표대로 장기적인 결과에 집중(long term focus)했고, 상장 10년만인 지난해 2월 엑슨모빌을 제치고 시가총액 세계 2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프랑스 기업이나 구글의 사례에서 보듯 의결권 차등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미국 캐나다 등은 회사 정관에 근거가 있을 경우 장기 보유주주에게 인센티브를 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다우존스 등 미디어 기업은 일찌감치 경영권 안정을 위해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했다. 워런 버핏의 벅셔 해서웨이와 포드도 이 제도를 통해 가족경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가 차등의결권을 거부한 홍콩증권거래소를 버리고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선택해 지난해 9월 상장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차등의결권을 통한 ‘기업가 정신의 유지와 장기적 관점의 경영’을 원했다.

브리티시텔레콤 싱가포르텔레콤 도이치텔레콤 등은 2년 이상 보유한 주주에게 일정 비율의 주식을 배당한다. 네덜란드에선 장기 투자 주주에게 이익배당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주주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한 헤지펀드가 법정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1주1표제에 집착했던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다양한 의결권제도를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등의결권제도가) 기업 가치를 훼손한다는 주장의 논리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판단에서다. 지금은 유럽 300대 상장기업중 약 20%가 차등의결권주를 도입했다. 스웨덴(59%) 프랑스(58%), 네덜란드(45%)의 제도 도입률이 높다.

◈세계에서 4번째로 짧은 주식 보유 기간…한국의 ‘분기 자본주의’

의결권을 차등화한 나라는 대체로 다른 국가에 비해 장기 투자를 하고 있다. 투자자들의 평균 주식 보유기간을 살펴보면 이탈리아가 7.2개월로 가장 짧고 중국(7.3개월) 사우디아라비아(8.3개월) 한국(8.6개월)이 뒤를 잇고 있다. 헤지펀드가 많고 극단타매매(High Friquency Trade)가 성행하는 미국도 9.7개월로 한국보다 한달 이상 길다. 일본(12.1개월), 영국(14.3개월) 프랑스(18.2개월) 싱가포르(27.9개월)의 보유기간은 평균 1년 또는 2년 이상이다. 세계은행이 2012년 자료로 집계한 144개국의 주식 거래회전율을 김수연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원이 거꾸로 계산한 수치(KERI Brief 15-06)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 때문일까. 적은 돈을 크게 불려보려는 ‘한탕주의’ 탓일까. 장기투자보다는 단기매매로 시세차익을 얻으려는 한국의 투자 문화는 갈수록 심해지는 듯하다. 개인투자자의 평균 주식보유기간(0.4년)보다 기관투자가인 자산운용사의 보유기간(0.36년)이 더 짧다. 국민연금은 1.23년, 외국인 투자자는 1.14년(이상 2010년 자본시장연구원 조사)이다. 개인이나 운용사의 단기 매매, 그에 따라 단기실적에 급급한 기업의 경영 행태가 악순환하는 양상이다. 분기 실적 향상에만 열을 올리는 ‘분기 자본주의(quaterly capitalism)‘의 단면이자 한국 자본시장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중소·벤처기업에 ‘테뉴어 보팅’ 도입"…‘인내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둘러싼 삼성그룹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법정 공방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합병비율이 불공정하다며 엘리엇이 낸 주주총회 금지 가처분 신청을 지난 1일 법원이 기각하자 엘리엇은 즉시 항고했다. 오는 13일 항고심이 열린다. 삼성물산이 자사주를 KCC로 매각해 의결권을 살린 부분에 대해서도 법원은 7일 엘리엇의 자사주 매각 금지 가처분 소송을 기각했다. 오는 17일 합병주총에서 표 대결에 따라 합병 여부가 결정된다. 이런 와중에 2004년 삼성물산을 공격했던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까지 삼성 협공에 가세했다. 지난 3일 삼성정밀화학 지분 5.02%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했다. “이번 사건은 한국 자본주의가 성숙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진통”이라는 진단(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도 나온다.

의결권 차등화가 ‘1주1의결권’이라는 상법 제369조 제1항의 대원칙에 어긋난다는 정서가 국내에선 아직 강하다. 그러나 장기투자를 유도하면서 경영권 안정을 이뤄내야 국가경제의 지속적인 혁신과 성장 즉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지 않을까. “차등의결권보다는 창업자나 장기 투자자를 우대하는 방식으로 테뉴어 보팅을 우선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이동기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의 제안이 설득력을 갖는다. 이 교수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대기업보다는 활력있는 혁신과 성장을 위해 벤처·중소·중견기업에 이 제도를 먼저 적용하는 게 현실적이다”고 주장했다. 신경철 코스닥협회장도 “(대주주 지분이 낮은 코스닥 기업의) 경영권 방어 대한 고민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테뉴어 보팅이나 차등의결권 제도 도입이 대안이 될 수 있다”라고 반겼다.

구글이나 알리바바처럼 길게 보는 전략적인 안목은 투자자나 경영자에게 모두 필요하다. 래리 페이지가 “분기나 반기 실적에 얽매이는 것은 다이어트중인 사람이 (운동은 안하고) 30분마다 체중을 재는 것과 같다”라고 꼬집지 않았는가. 의결권 차등화는 장기 투자와 경영 안정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대안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기업의 혁신과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인내 자본(patient capital)‘을 확대 재생산할 것이다. 투자자들은 고배당과 주가상승이라는 인내의 결과물을 얻게 된다. 이를 재투자해 또 다른 인내 자본을 만들 수 있다. 의결권 차등화가 한국 자본시장의 질적인 성장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는 까닭이다.

최명수 한경닷컴 뉴스국 부국장 max@hankyung.com

*자본시장에 관한 제보와 질문 의견을 받습니다.
max@hankyung.com으로 이메일을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