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문제가 없으면 기어이 만들어 낸다
하나의 감정이 사회 전체를 관통하면서 구성원 모두에게 유사한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은 종종 관찰된다. 공감이나 증오도 감정의 동조를 일으킨다. 집단 히스테리는 전염되고 증폭되며 확산된다. 우리는 그 전염병에 엮여드는 사람들을 레밍이라고도, 군중이라고도 부른다. 나홀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느끼는, 다시 말해 부유하는 군중의 광기 속에서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아큐들이 모이게 되면 그런 증후군은 실로 사회적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의 주먹에 얼굴을 맞으면 그가 나를 때린 것이 아니라 내 이마가 그의 주먹을 때렸노라고 자위하는 아큐 말이다. 아큐 상태에서는 하나의 조작된 심리적 전염병이 노드와 링크를 따라 핵분열적으로 확산된다.

개인성의 부재나 취약성은 전체성과 집단성에서 비로소 위안을 얻는다. 타인 의존적이거나 독립심이 낮은 사람들은 그래서 모순적이게도 불안하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한다. 그런 정신의 질병은 한국인에게서 도드라진다. 거대한 불안에 함께 휩쓸려들지 않으면 세상은 무미건조한 나날들의 연속이다. 안도의 한숨조차 불안을 통해 고양된다. 광우병 집단히스테리 속에서 비로소, 하나의 동질적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결코 나 혼자가 아니라는 안심과 위로를 느끼는 것 말이다. 손을 맞잡고 함께 촛불을 들어야 비로소 내가 아닌 우리라는 동류의식을 갖게 되고 우리가 하나가 돼 외부의 적과 마주하고 있다는 두근거리는 일체감을 갖는다. 그러므로 혼란은 부채질되고 문제가 악성화될수록 환영을 받는다. 군중성은 독립심의 부재, 혹은 이성의 결락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국인들은 그것을 객관적 실체라고 생각한다. 인식론적으로는 이를 유아적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며칠만 조용해도 왜 이렇게 조용한지를 궁금해한다. 더 큰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이전의 작은 사건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더 큰 사건이 터질 때까지 사건은 자꾸 자라난다. 그러다가 배양 가능성이 있는 작은 사건이라도 걸려들면 그 순간 바이러스는 폭발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과도한 경쟁과 지나친 긴장감은 하나의 작은 문제 상황을 극적으로 고양시키면서 비로소 다른 진짜 문제의 갑작스러운 등장 혹은 부재를 안심시킨다. 왜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가 궁금하다면 안심하시라. 곧 문제가 터진다. 그렇게 중동감기(MERS·메르스)사건이 터진 것이다. 메르스는 실체지만 메르스 공포는 만들어진 것이다.

유독 한국에서만 문제가 터진다? 오히려 문제없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지루한 천국보다는 짜릿한 지옥이 낫다는 익숙한 기질 때문일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메르스는 약한 전염병이다. 지금까지의 사망자 6명도 모두 다른 질병으로 최악에 직면해 있던 사람들이다. 전염병 중에 오히려 치명적인 것은 결핵이다. 1년(2013년)에 3만6000여명이 감염되고 이 중 2230여명이 죽는다. 거의 모든 호흡기 질환의 종착역인 폐렴은 죽는 사람만도 1년에 1만900여명이다. 매일 병원에서 수십 명이 전염성 혹은 호흡기 질병으로 죽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곳이 어떤 병원인지를 묻지 않는다. 교통사고 사망자는 한때 1만3000여명의 기록을 남긴 채 지금은 5000여명으로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게 위험한 길거리에는 오늘도 인파가 넘쳐난다. 메르스 때문에 통행이 줄어들면 메르스 감염자가 줄어서가 아니라 교통사고가 줄어들어 재난 사망자가 줄어든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다. 비브리오패혈증으로도 31명이 죽고, 쓰쓰가무시병도 1만여명이 전염돼 23명이 죽었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치 낯가리는 어린아이처럼 한국인들은 낯선 것에만 히스테리컬하다. 유아적이요 반과학적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재난이 발생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것의 연속적 점층적 충격이 요구된다. 뿌리 깊은 피해 의식은 필시 유전자에 기록된 것이다. 한국형 문제 유전체(KPG)라 불러야 마땅하다. 집단주의에 중독된 한국인의 밈(Meme)에 문제가 있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