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장은 “무한·과열 경쟁, 사회적 갈등 고조 등으로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예민해졌다”며 “인격적 수양을 쌓아 좀 둔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이시형 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장은 “무한·과열 경쟁, 사회적 갈등 고조 등으로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예민해졌다”며 “인격적 수양을 쌓아 좀 둔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이시형 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장(81)은 1982년 첫 번째 저서인 《배짱으로 삽시다》(풀잎)를 출간했다. 미국 예일대에서 사회정신의학을 전공한 의학자가 우리 사회의 정신병리적인 현상에 대해 내놓은 첫 공개적 처방이자 발언이었다. 체면과 소심증, 열등감, 대인불안증 등으로 경직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 책은 ‘배짱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밀리언셀러가 됐다. 그로부터 33년 뒤, 이 원장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진단과 처방을 내놨다. 지난 4월 말 펴낸 《둔하게 삽시다》(한국경제신문)를 통해서다. 최근 서울 서초동 세로토닌문화원에서 만난 이 원장은 “그동안 한국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더 이상 배짱만 권할 수 없게 됐다”며 “무한·과열 경쟁 등으로 지나치게 예민해진 세상에 이제 좀 ‘둔하게 살자’고 외치고 싶다”고 말했다.

▷‘화병(Hwa-byung)’을 연구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정신의학 용어로 만들었습니다. 화병의 양상도 그동안 많이 달라졌을 텐데요.

“옛날엔 주로 시어머니 등쌀을 못 견디는 며느리가 화병을 앓았다면 요즘은 시어머니도 화병에 걸려요.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 참는다고 하잖아요. 경제적 발전을 이루면서 요즘 화병은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많이 생깁니다. 가령 못 사는 건 잘사는 부자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화를 내죠. 그런 맹목적 분노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부자를 무조건 미워하고 폄하하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을 존경해야 부자가 될 가능성이 커지죠. 우리는 비교 본성이 있어요. 돈과 외모 모두 비교합니다. 시골에서는 다 못 살아도 행복했죠. 하지만 지금은 잘살아도 불행해요. 해결할 수 없는 고민에 빠지면 화가 나고 불행해집니다. 가령 키가 작다는 것을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이 됩니까.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해요. 고민해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하고, 대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그걸 키워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정신병리학적 문제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30여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도시인으로서의 감각이 없었어요. 중년 여성이 양손에 짐을 들고 힘겹게 길을 가는데 뒤에서 걷는 젊은이는 신문 하나 달랑 들고는 쳐다보기만 했죠.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잘 모르고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었어요. 그래서 배짱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지금은 과민이 문제입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도 그냥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째려봤다는 이유로 사람을 두들겨 패는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경쟁이 심해지고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죠. 그러니 별것 아닌 일로 오해하고, 피해의식도 생기는 것이죠. 이런 과민증후군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드뭅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둔하게 살자’고 얘기할 시점이 된 것이죠.”

▷직장에서도 화가 나거나 극도로 예민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딱 봐도 그냥 싫고 미운 사람이 있어요. 조건반사처럼 화가 팍 나죠. 그럴 때는 뇌의 판단 기능을 살려 왜 화가 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감정은 의사(意思)나 의지대로 바뀌지 않지만 기분을 나쁘게 만든 생각은 합리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자극 과잉 시대에는 자극을 잘 선별해서 무시할 것은 무시해야 합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 부장과 과장, 선배가 각각 따로 하는 소리에 일일이 반응하면 일만 쌓이고, 바쁘게 하긴 했는데 해놓은 일은 없고요.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화가 나죠. 좀 더 둔해져야 합니다.”

▷같은 환경에서도 너무 예민해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지만 압박을 견디면서 성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격적으로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거나 쉽게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어요. 매사 긍정적이거나 야심이 많은 사람도 그렇죠. 하지만 몇 날 며칠 끙끙대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죠. 안 되는 건 체념해야지 계속 끙끙대면 인생은 망하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중에서도 이걸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소리 지르고 사람들을 달달 볶아요. 예전에는 ‘나를 따르라’는 해병대 방식이 통했지만 지금 그런 스타일을 고수해서는 직원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운영되는 기업은 사회에서도 신용하지 않고요. 인문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CEO(최고경영자)들이 많아진 것도 그런 사회적 흐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둔하게 살고 싶어도 이미 성격적으로 굳어져 실행하기 어려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둔하게’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진짜 둔하면 문제입니다. 집안에 도둑이 들었는데 둔하게 행동하면 안 되죠. 재빨리 대처해야죠. ‘둔하게 살자’는 건 인격적으로 상당히 고차원적인 얘기입니다. 정말 산전수전 겪고 인격적인 수준에 오르면 둔해져요. 둔하게 살려면 인생의 내공이 쌓여야 합니다. 작은 일로 아웅다웅 다투고, 신경이 쓰여 잠도 못 자는 게 노이로제인데 이걸 넘어서야 합니다. ‘예민해지고 과민하게 굴면 나만 손해’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세로토닌 전도사’로 불립니다. 《둔하게 삽시다》에서도 ‘세로토닌적 삶’을 강조하셨죠.

“세로토닌은 평온과 쾌적함,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뇌신경전달물질입니다. 뇌가 극단으로 가지 않게 잘 조절해 평상심을 유지해주는 기능을 해요. 불행히도 오늘의 한국 사회는 세로토닌 결핍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어요. 과민증후군을 예방하려면 세로토닌이 활성화돼야 합니다. 세로토닌적 삶은 기본과 원칙을 지키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지향하고, 외적 성장보다 내적 성숙을 중시하는 삶이죠. 재충전을 위해 자기와의 시간도 갖고요. 요약하면 고고한 정신세계를 가진 옛 선비들이 그런 삶을 살았어요. 이제는 경제적 성장의 시대에서 영적 성숙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도 세로토닌적 삶을 살 때가 됐습니다.”

▷선비의 삶을 말씀하시니 문인화가 떠오릅니다. 문인화를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최근 1년 새 문인화 개인전을 네 차례나 열었습니다.

“80년의 삶을 되돌아보며 제가 가장 못 하는 것에 도전해보자고 마음먹은 적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그림입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넌 그림 그리기 싫어하고 방해만 되니 나가서 공이나 차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러다 2013년 김양수 화백에게서 문인화를 배웠습니다. 산과 숲을 그리고 글을 몇 자 적었어요. 부끄러워서 버리려고 하는 걸 김 화백이 자꾸 가져가더군요. 김 화백으로부터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고향이나 어머니 등 여러 생각이 나게 하는 ‘좋은 그림’이란 칭찬을 받고 용기가 생겼고 전시회까지 열게 됐죠.”

▷그림을 그리면서 달라진 게 있습니까.

“그림을 그리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집니다. 사물을 자세하게 관찰하게 되고요. 그림에 들어갈 글을 생각하다 보면 시인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더 창조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좀 더 둔해지고 세로토닌적 삶을 사는 데 문인화가 도움이 됐습니다.”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멘토로서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취업이 되지 않으면 정말 민감해지죠. 하지만 인생은 진짜 길다는 걸 염두에 뒀으면 합니다. ‘젊은 사람에겐 실패란 없다, 과정일 뿐’이란 생각을 여유롭게 해야 합니다. 실패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돼요. 쉼표를 찍어야지,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됩니다. ‘난 실패자다, 실업자다’란 식으로 자기를 규정하지 말고,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시형 원장은…

《둔하게 삽시다》는 이시형 원장의 80번째 저서다. 첫 책을 1982년에 냈으니, 33년간 매년 두세 권의 책을 낸 셈이다. 전문 작가를 능가하는 왕성한 저작 활동의 원천은 풍부한 독서와 사색이다. 이 원장은 매주 서점에 직접 가 대여섯 권의 신간을 구입해 읽는다. 그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서너시간 책을 보거나 글을 쓴다”며 “그 시간이 내게는 큰 위안이자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그의 명함에는 본인이 아닌 비서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다.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지만 전화할 때만 켠다.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휴대폰으로 인해 사색의 흐름이 끊기는 게 싫다”고 했다. 그의 글은 단문이다. 쉽게 술술 읽힌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문장이 길어 숨이 벅찰 때가 있다”며 “독자를 믿지 못하면 문장이 길어진다”고 말했다.

△1934년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경북대 의학과 졸업 △미국 예일대 신경정신과학 박사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 △강북삼성병원장 △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장 △세로토닌문화원장 △힐리언스 선마을 촌장 △대한신경정신학과 벽봉학술상 △제10회 산의 날 국민훈장

송태형/박상익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