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 트인 미술시장…스타 화가 잇단 복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국내 미술가들의 국제적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은 것 같아요. 하지만 세계적 작가 못지않은 기본기를 갖추고 있습니다.”(화가 사석원)

“많은 작가가 정치적, 경제적 과도기를 거쳐 클릭 한 번으로 수많은 정보를 받아보는 디지털 시대에도 저는 아날로그 방식의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합니다. 이게 바로 도전정신이 아닐까요.”(화가 함경아)

미술시장이 최대 호황을 이어가던 2005~2008년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미술가들이 저마다 독특한 ‘손맛’이 깃든 신작을 쏟아내며 속속 화단에 복귀하고 있다. 서울 인사동과 청담동 등 화랑가에는 스타 화가 이왈종을 비롯해 오치균, 사석원, 김준, 서용선, 배병우, 이석주, 전병현, 지석철, 이영학, 함경아 씨 등 30여명이 개인전을 열거나 준비 중이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서서히 묵혀뒀던 뒷심을 발휘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을지 기대된다.

미술평론가 김종근 씨는 “단색화 열풍을 비롯해 고미술에 대한 관심 증가, 국제 미술시장 호황 여파 등으로 미술시장은 미래의 ‘블루칩’ 찾기에 분주하다”며 “한때 유명세를 탄 작가들의 작품이 시장에 쏟아져나오는 것은 이 같은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는 12일 가나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시작하는 사석원의 ‘창덕궁 규장각 숫사슴’.
오는 12일 가나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시작하는 사석원의 ‘창덕궁 규장각 숫사슴’.
◆줄 잇는 전시회

올 들어 미술시장에 숨통이 트이고 피가 돌기 시작하자 작가들은 얄팍한 트렌드에 의지하기보다는 끊임없는 도전 정신과 자기성찰, 혁신적 시도에 독창성까지 가미된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선봉은 당나귀 그림으로 유명한 사석원 씨(58)다. 그는 오는 12일부터 한 달간 ‘고궁보월(古宮步月)’을 주제로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연다. 3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서울에 흩어져 있는 옛 궁궐의 스토리를 작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붓질한 신작 40여점을 건다.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를 비롯한 해외 미술행사에서 자수 프로젝트로 이름을 날린 함경아 씨(56)도 6년 만에 화단에 돌아왔다. 4일부터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함씨는 북한과 이데올로기를 주제로 한 자수회화 작품을 내보인다. 한지 죽을 이용해 독특한 질감을 내는 꽃 그림으로 유명한 전병현 씨(57)는 미술시장 저변 확대와 대중화 차원에서 10일 관훈동 노화랑에서 소품 100점을 전시, 판매한다. “그림을 그리겠다”며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서용선 씨(6월17일까지, 학고재갤러리)도 4년 만에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서씨는 현대인의 표정을 곁들여 현대 도시를 투박하게 묘사한 작품 30여점을 걸었다. ‘향불화가’로 알려진 이길우 씨(30일까지, 나무 모던앤컨템포러리갤러리)는 인두와 향불로 한지를 태워 여러 겹의 이미지를 배접한 작품을, 몸과 문신에 대해 탐닉해온 미디어 작가 김준 씨(6월21일까지, 박여숙화랑)는 붓 대신 픽셀로 만들어진 정교한 인체에 피부를 입히고 그 위에 문양을 새겨 넣은 신작 30여점을 내놓았다.

국내에서 두터운 컬렉터층을 형성하고 있는 작가들도 개인전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인기 작가 이왈종 화백은 이달 불우이웃돕기 판화전과 오는 9월 갤러리 현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준비 중이고, 붓 대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를 두껍게 칠하는 기법의 지두화가 오치균 씨는 금호미술관 초대전을 추진하고 있다. 또 컬러풀한 정물의 묘사로 주목받고 있는 홍경택, 쌀을 소재로 인물을 그리는 이동재, ‘덕용불패’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김덕용, 붓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이정웅, 배준성, 민성식, 변웅필 씨 등도 조만간 신작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들의 어떤 ‘비밀 병기’가 다시 컬렉터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을지 주목된다.

◆컬렉터들 관심 집중

국내 화단과 홍콩 경매시장을 통해 이름이 알려진 이들 작가는 젊은 작가에 비해 작품성이 검증된 데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장기 투자 차원에서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게 미술계의 분석이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실험성이 강한 젊은 작가들은 순간 타올랐다 금세 사라지는 특징이 있는 반면, 이들은 자기 색깔이 뚜렷하기 때문에 언제든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릴 수 있다”며 “비주얼이나 이미지가 아닌 미술 자체를 받아들일 줄 아는 컬렉터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입지도 크게 강화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40~50대가 컬렉터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동시대 작가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3050세대 작가는 실험성이 강하지만 이들 작가는 검증을 거쳐 가격 변동성이 비교적 크지 않다”며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면서 한국적 멋을 잘 표현하느냐가 상품성의 잣대가 된다”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