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버린 달동네 벽에 그림들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스산하고 누추했던 마을이 마치 꽃처럼 피어났다. 벽화마을은 그렇게 시작됐다. 폐가가 많아 잘 찾지 않던 동네가 이제는 유명 관광명소가 되고 지역경제도 살아났다. 떠났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마을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벽화마을 찾는 것은 1970~80년대를 살았던 추억의 힘과 마을의 그림들 때문이다. 벽화가 있는 마을로 추억여행을 떠나보자.
경남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벽화사진을 찍는 어린아이.
경남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벽화사진을 찍는 어린아이.
바다와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곳

‘동쪽 피랑(벼랑)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동피랑은 경남 통영항 중앙시장 뒤편에 있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춰진 듯 산업화 시대의 모습들이 그대 로 남아 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전깃줄과 긴 줄에 깃발처럼 나부끼는 빨래,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녹슨 창살까지 어느 것 하나 세월의 더께가 쌓이지 않은 것이 없다.

동피랑 마을이 형성된 것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영항과 중앙시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마을이 됐고, 한때는 200가구가 넘게 살던 곳이었다. 벽화마을이 되기 전에 동피랑은 철거 예정지였다. 충무공이 설치한 옛 통제영의 동포루를 복원하려고 계획한 상태였다. 철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보상금을 받고 떠나겠다는 이와 오갈 데 없으니 철거될 때까지는 남아 있겠다며 서글픈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있었다.

전국 미술학도들이 만든 기적

천사날개 벽화는 동피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곳 중 하나.
천사날개 벽화는 동피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곳 중 하나.
극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은 2006년 11월 ‘푸른 통영 21’이라는 시민단체가 “달동네도 가꾸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며 마을 살리기를 위한 대대적인 공모전을 열면서부터였다. 전국 각지의 미술학도들이 통영으로 내려왔다. 그림 재료를 가지고 아무 보수도 없이 골목마다 벽화를 그렸다.

달동네의 변신은 눈부셨다. 저마다 개성 넘치는 그림이 벽마다 그려지자 수많은 이들이 동피랑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이는 카메라를 들고 와서 마을의 벽화들을 남김없이 담아갔다. 그들이 찍은 사진은 인터넷을 타고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신문과 잡지 텔레비전에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동피랑 마을이 벽화마을로 거듭나기 전만 해도 강경하게 철거를 주장했던 통영시도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집 3채만 철거하기로 하고 예술가들의 작품활동을 적극 지원해 주기로 했다.

동피랑을 구경하려면 중앙시장 옆 강원수산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면 벽마다 새로운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동피랑의 상징이 된 천사 날개 그림을 비롯해 커다란 고래가 그려진 벽화도 있다. 푸른 바다가 금방이라도 물결을 토해낼 것 같은 벽화도 보인다.

카페 울라봉, 파고다 카페 등 볼거리 다양

동피랑의 명물인 몽다르다 카페.
동피랑의 명물인 몽다르다 카페.
구불구불 마치 실핏줄처럼 펼쳐진 마을을 숨바꼭질하듯이 올라가면 프랑스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패러디한 ‘몽마르다 카페’와 ‘파고다 카페’를 만난다. 몽마르다 카페가 제법 외양을 갖춘 현대식 카페라면 파고다 카페는 간판은 카페인데 사실은 조그만 구멍가게다. 한 평 남짓한 작은 가게에는 과자와 음료수, 컵라면이 전부다.

동피랑 마을의 다양한 카페 가운데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 ‘카페 울라봉’이다. 평일에도 40분 정도는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이 카페가 명물이 된 것은 카페 벽에 그려진 이티(E.T.)와 함께 내부의 독특한 인테리어 때문이다. 의자를 거꾸로 벽에 붙여 놓는가 하면 보드판에는 다양한 폴라로이드 사진이 길게 붙어 있다. ‘쌍욕라떼’ ‘착한말라떼’ 등 기발한 커피도 눈길을 끈다. 쌍욕라떼에는 정말로 걸죽한 욕을 생크림으로 써서 손님에게 내놓는다. 욕을 먹으면서도 사람들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강원 동해시 묵호의 등대마을인 논골담길의 벽화.
강원 동해시 묵호의 등대마을인 논골담길의 벽화.
마을의 그림은 2년마다 다시 그린다고 한다. 2년이 지나면 벽화의 색이 바래기 때문이다. 어떤 그림은 이미 기한이 넘어서인지 흰색 페인트를 덧칠해 놓고 다시 그릴 그림의 밑그림을 그려놓았다.

동피랑 마을 끝까지 올라가면 바다가 마을 너머로 푸르게 펼쳐져 있다. 바다의 소리와 바람의 숨결을 느끼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으면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문득 하찮게 느껴진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을에 붙들리고 싶은 것은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의 마음일 것이다. 허락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거나 큰 소리로 떠들어 마을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이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푸른통영21사무국 (055)649-2263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벽화마을의 꽃계단길.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벽화마을의 꽃계단길.
이화동벽화마을-출사 여행지로 인기

서울 대학로(동숭동) 마로니에공원 뒷골목에는 이색 풍경이 펼쳐지는 마을이 있다. 가파른 계단 끝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집들, 마을 곳곳을 수놓은 벽화는 언덕 위 작은 마을을 갤러리로 만들었다. ‘하늘 동네’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이화동벽화마을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그린 이야기마을의 벽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그린 이야기마을의 벽화.
이 마을은 2006년 ‘낙산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미술가는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그들의 손끝에서 돌계단에 꽃이 피고, 담벼락에는 새가 내려앉았다. 그림은 그림으로 머물지 않고 마을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서울에서 가장 낙후한 축에 들었던 마을이 아름다운 벽화마을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화벽화마을은 출사 여행지로, 커플들의 데이트 코스로 이름을 날렸다.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들까지도 꼭 한 번 들러보는 서울의 이색 명소가 됐다.

이화벽화마을로 가는 코스는 다양하다. 크게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마로니에공원을 거쳐 쇳대박물관 옆길로 오르는 코스와 이화동주민센터 사잇길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이화동 주민센터에서 얻을 수 있는 ‘벽화마을 착한여행지도’를 참조하면 벽화들의 위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즐겁게 벽화마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이화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이 어김없이 인증샷을 찍는 천사날개 벽화에서 바로 밑으로 타일모자이크 벽화인 꽃계단이 보인다. 이화벽화마을은 벽화도 아름답지만 나무 전봇대나 적산가옥 등의 근대 유산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울시 관광체육과 (02)2148-1856
태백시 상장동 이야기마을의 벽화. ♣♣한국관광공사 제공
태백시 상장동 이야기마을의 벽화. ♣♣한국관광공사 제공
상장동 이야기마을-탄광촌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다

태백시 상장동 이야기마을(cafe.daum.net/5-0-7-0)은 과거 최대 민영탄광이었던 함태탄광과 동해산업 등의 광부 4000여명이 살던 광산 사택촌이다. 석탄산업이 발전했던 1960~70년대 이 지역은 그야말로 번화가였다. 식당과 대폿집이 즐비했다. 1990년대 석탄 합리화 정책 이후 그 많던 탄광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단층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조용한 마을이 됐다.

이야기마을의 벽화 중 하나. 예전 좋았던 시절의 풍경을 담았다.
이야기마을의 벽화 중 하나. 예전 좋았던 시절의 풍경을 담았다.
쓸쓸했던 마을 풍경을 태백여성수채화협회 ‘물과 나눈 이야기’ 회원들이 바꿔 놓았다. 한 달여에 걸친 벽화 그리기 재능기부로 불모지나 다름 없던 폐광촌 마을을 아름다운 벽화마을로 변모시켰다. 상장동 벽화에는 고단했던 광부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좋았던 시절 탄광마을에 돈이 하도 많이 돌아서 강아지도 1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이야기 속 강아지 ‘만복이’도 벽화 속에서 익살스럽게 웃고 있다. 또한 태백의 전설들이 벽화를 통해 재미있게 표현돼 있다. 시주하러온 스님과 고약스러운 노랭이 황부자, 황부자 몰래 시주하는 며느리, 서둘러 황부잣집을 울면서 떠나는 며느리 등 하나하나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033)552-1373

동해 묵호등대마을 & 논골담길-태국 공중파에서 소개

대부분 어촌마을이 그렇듯 묵호등대마을도 한때 꽤나 흥성했던 곳이다. 바다에 그물만 던지면 고기가 올라오던 시절 배가 항에 닿으면 마을이 흥청거렸고, 동네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획량은 줄고 많은 사람이 떠나면서 쓸쓸한 어촌마을로 조금씩 쇠락해갔다.

소박한 삶의 풍경이 느껴지는 논골담길 벽화.
소박한 삶의 풍경이 느껴지는 논골담길 벽화.
등대마을 맨 위에는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의 촬영지인 묵호등대가 자리하고 있다. 등대마을에서 바다로 이어진 길이 벽화로 유명해진 논골담길이다. 2010년 동해문화원이 공모사업으로 논골담길에 지역 어르신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벽화 길을 조성해 전국적인 명소로 자리 잡았다. 태국의 공중파 방송에서도 촬영해 한류벽화마을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논골담길은 4개의 길로 서로 연결돼 있다. 논골1길, 2길, 3길, 등대오름길 등 벽화길마다 주제가 정해져 있다. 논골1길은 묵호의 현재, 논골2길은 시간의 혼재, 논골3길은 묵호의 과거, 등대 오름길은 희망과 미래를 주제로 삼고 있다. 논골담길의 벽화를 보면 마치 설치미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고기 모양의 입체 상징물도 있고 자연의 느낌을 물씬 살린 작품도 있다. 버려진 슈퍼는 이제 사람이 더 이상 살지 않지만 대신 벽화로 살아 남았다. 슈퍼 터의 벽에는 슈퍼 안에만 있는 아이스크림통 전화기 등이 그려져 독특한 작품이 됐다. 묵호등대 (033)531-3258, 동해문화원 (033)531-3298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