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의 1888년 작품 ‘페르난도 서커스의 곡마사’. 프란츠 카프카는 단편소설 ‘갤러리에서’를 통해 인간이 처한 위험과 고통을 폭로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의 1888년 작품 ‘페르난도 서커스의 곡마사’. 프란츠 카프카는 단편소설 ‘갤러리에서’를 통해 인간이 처한 위험과 고통을 폭로했다.
독일의 문호 프리드리히 횔더린은 “인생은 고통에서 양분을 얻는다”는 말을 남겼다. 명작 ‘히페리온’을 쓴 그는 30년이 넘도록 정신착란에 시달리며 고통받았다. 대문호가 아니어도 인간은 살면서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고통을 이겨낼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은 한 번의 고통에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반면 성숙한 삶을 이루기 위해 없는 고통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책마을] 아름다운 허상 뒤엔 고통이 숨어 있다
이럴 때 유용한 도구로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책과 문학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이 겪는 고통을 간접 체험함으로써 삶의 내면을 튼튼하게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해석》은 원로 독문학자인 이창복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근·현대 독일 작가들의 단편 19개를 골라 해설을 붙인 책이다.

책 속엔 헤벨, 괴테, 카프카, 보르헤르트, 브레히트, 뵐, 뮐러 등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모두 독일 김나지움(중등교육기관)의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흔히 알고 있는 단편보다 훨씬 짧은 글이라 읽는 데 큰 부담은 없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을 파악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이 교수는 독자를 위해 철학·역사학·사회학·종교학을 넘나들며 통합적이고 풍부한 해석을 제시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갤러리에서’는 원형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여성 곡마사의 곡예를 가정법으로 묘사하고, 가혹한 훈련을 멈출 것을 외치는 손님의 모습이 직설법으로 그려진다. 카프카는 곡마사가 ‘자신의 행복을 서커스단 모두에게 나눠주고 싶어 한다’고 썼지만 저자는 이것이 허위와 기만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카프카의 문학에서 진실은 허상 뒤에 숨겨지고 허상은 진실로 비친다는 것이다. 저자는 “줄거리가 짧은데도 문장과 언어의 형태가 건축학적 구조를 띠고 있는 작품”이라며 “‘갤러리에서’처럼 이 세상의 고통은 아름다운 가상의 허위로 가려져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작품은 드물다”고 설명한다.

스물여섯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잔다’는 아이와 노인의 대화를 두 축으로 삼은 작품이다. 아홉 살 난 아이가 폭격으로 무너진 집 앞을 지키고 있다. 잔해에 묻힌 동생을 쥐들로부터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노인은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잔다”는 말로 달래며 아이가 혼돈의 세계에서 정상적인 삶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 짧은 이야기의 마지막엔 ‘폐허 위를 비추는 태양’과 ‘회색 먼지 속의 푸른 풀’이 희망의 징후로 등장한다. 이는 모든 젊은이에게 고통 속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라고 보내는 메시지다.

요한 페터 헤벨의 ‘물장수’는 같은 일을 하다 동시에 복권에 당첨된 물장수 두 명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당첨금을 아껴 부자가 되지만 다른 사람은 낭비하는 삶을 살다 다시 물장수로 돌아간다. 그런데 헤벨은 도로 물장수가 된 사람보다 빈털터리가 된 동료를 비웃는 부자의 금전욕을 비판한다. 두 물장수의 삶은 ‘소유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를 위한 소유’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저자는 “문학은 주어진 소재를 단순히 베끼는 것이 아니라 압축된 표현과 재치 있는 비유를 통해 그 소재를 예술적으로 변형해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삶의 지혜를 독자에게 전한다”고 말한다. “문학은 세상과 독자 사이에 작가가 세워놓은 거울과 같은 것”이란 설명이다.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며 ‘힐링’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고전을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류가 겪어온 고통과 이를 극복하는 처방전과도 같기 때문에 고전은 지금도 유효하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