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던 때가 있었다. 밥 한 그릇에 찬기 하나만 있어도 둘러앉은 식구(食口)가 있기에 넉넉하고 풍성한 식탁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제대로 한 끼를 채우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바쁜 일상 속 빠르고 간편한 식문화는 ‘감동’을 앗아갔고 엄마의 ‘손맛’이 그리워지게 했다. 값비싼 코스 요리를 뒤로하고 ‘집밥’이 뜨는 배경이다. 그리고 시장은 정확히 트렌드를 읽어 냈다. 지금은 바야흐로 한식의 전성시대다.
한식 뷔페 '올반'의 주요 메뉴.
한식 뷔페 '올반'의 주요 메뉴.
한식은 ‘건강 밥상’으로 통한다. 신선한 제철 식재료에 손맛까지 깃들면 맛과 영양 만점 음식이 된다. ‘밥상 소통’, 정을 나누기에도 한식이 제격이다. 밥·국·찌개·나물·적…. 한 상을 마주하고 오고가는 손길 속에 따뜻함이 전해진다.

한식이 이제 새로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시작된 한식 열풍은 외식 업계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한식 뷔페가 대표적이다. 한식 다이닝, 한식 디저트, 한식 주점까지 주목받는다. 젊은 셰프들이 한식을 무기 삼아 해외 문을 두드리며 한식 세계화에 돌파구가 열릴 날도 머지않았다.

한식 뷔페 뛰어든 대기업 삼총사

2월 11일 저녁 6시, 서울 인사동 ‘비비고 계절밥상’에 들어서니 샐러드 바 형태의 100여 종의 한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매장 입구 바로 앞 ‘숙성실’에 장독대가 층층이 쌓여 있는데, 지난해 10월부터 담근 장과 장아찌들이 제맛을 내는 중이다. 장독대를 지나가니 즉석 김구이 코너에선 솥뚜껑에 김이 익어가고 간식 코너에선 ‘씨앗호떡’이 둥그런 모양을 내고 있다. 인기 메뉴인 ‘가마 고추장 삼겹살 구이’를 비롯해 ‘마늘 꽃게 강정’, ‘꼬시래기 비빔밥’ 등 제철 메뉴가 오감을 자극한다. ‘핫스톤(돌솥)’ 메뉴는 해당 코너에 막대 번호를 두고 오니 테이블까지 배달됐다.

요즘 외식 업계의 ‘스타’는 단연 한식 뷔페다. 몇 시간씩 줄 서서 먹는 풍경이 2000년대 초·중반 패밀리 레스토랑의 인기를 떠올리게 한다. 양식과 시푸드 중심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한식으로 새 시장을 열었다. 대기업이 뛰어들면서 크게 3파전 양상을 보인다. CJ의 ‘계절밥상’, 이랜드의 ‘자연별곡’, 신세계의 ‘올반’이 ‘삼총사’다. 여기에 롯데가 ‘별미가’로 올 상반기 중 시장에 출격할 예정이다. CJ푸드빌 관계자는 “성인 기준으로 1만 원대에 죽에서부터 디저트까지 70~100여 종의 한식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게 인기 요인인 것 같다”며 “남녀노소 전 세대 고객들이 찾고 있고 외국인 고객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외식 업계에서는 한식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 왔다. CJ푸드빌은 계절밥상에 앞서 한식 브랜드 ‘비비고’를 시작으로 한식 파인다이닝 브랜드 ‘비비고 다담’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왔다. 계절밥상은 기존 한식 노하우에 ‘샐러드 바’ 콘셉트를 더해 탄생했다. 한식의 매력인 ‘8도 진미’를 ‘제철 식재료’를 통해 선보인다는 것이 전략이었다. 신세계는 한식 대가와 오랜 기간 콘셉트를 고민해 왔다. 박종숙 전통 요리 연구가와 함께 맛을 표준화·계량화하는 등 연구·개발(R&D)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찾은 코드가 바로 ‘반가 잔치음식’과 ‘종갓집 음식’이었다. 올반은 이를 바탕으로 창녕 조씨 명숙공 종가 길경탕, 보은 선씨 선영홍 종가 닭구이 등 평소 접하기 힘든 다양한 전통 한식 메뉴를 만들었다. 박종숙 요리 연구가의 계량화 노하우를 접목해 염도를 낮추고 과당을 줄였다.

그간 한식은 시장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재료가 많고 손이 많이 가는 반면 낮은 회전율과 양식에 비해 낮은 인지도 때문에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대기업도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한식 뷔페에서 소위 ‘잭팟’이 터진 셈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시장 측면에서 틈새를 잘 공략했다. 기존 한식은 저렴한 한 끼 식사와 값비싼 한정식 요리로 양극화돼 있었다. 합리적인 가격에 가족 단위로 즐길 수 있는 한식이 없다는 데서 아이디어를 냈다. 계절밥상(2013년 7월)·자연별곡(2014년 4월)·올반(2014년 10월)이 선보인 이후 올해 2월 현재까지 각각 7개, 22개, 4개 매장이 성황 중이다. 한식을 찾는 이들이 가성비(가격 대비 만족도) 높은 한식 뷔페를 선호하고 있다.

건강식의 대표 주자로 부상

보다 큰 흐름에서는 트렌드로 읽을 수 있다. 한국 사회는 ‘한식 권하는 사회’로 흐르고 있다.

100세 시대, 건강한 삶이 미덕으로 떠오르며 건강식의 대표 주자로 한식이 부상한 것이다. 음식학자인 정혜경 호서대 교수는 “음식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변했다. 한식의 여러 특징이 있지만 영양 측면에서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것 같다”며 “전 세계적으로 건강한 먹을거리 운동인 ‘로컬 푸드’, ‘슬로 푸드’ 운동이 일고 있는데 그 일환으로 한국에서는 한식이 주목 받는다”고 말했다. 로컬 푸드는 가장 가까운 현지 식재료를 이용하자는 운동을 말한다. 한식은 8도 각 지역의 특화된 식재료가 특징이다. 한국 땅에서 나는 채식 기반의 한식은 단연 영양이 풍부한 건강식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맥락에서 집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격식을 갖춘 한식을 선보이되 제철 음식과 저염식 등으로 건강을 고려한 점이 한식 뷔페의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킨포크 테이블(The Kinfolk Table: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식탁)’과 집밥 열기도 한몫한다. 미국 포크랜드에서 예술가들이 텃밭에서 수확한 식재료로 요리를 만들어 나눠 먹는 모임에서 시작된 계간지 ‘킨포크’의 푸드 스타일링 북이 킨포크 테이블이다. 소박하지만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일명 ‘킨포크 스타일’ 트렌드를 전파 중이다. 여기엔 느림과 여유를 지향하는 밥상이 소개되는데, 한국말로 풀이하면 ‘집밥’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신선한 재료로 만든 따뜻한 밥상을 나누는 일이다.

이와 같은 집밥은 특히 대중매체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TV에서 ‘집밥의 여왕’, ‘냉장고를 부탁해’, ‘삼시세끼’, ‘오늘 뭐 먹지’ 등 관련 프로그램이 날로 늘어가는 추세다. 최근 1~2년 사이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모르는 사람끼리 함께 밥 먹는 모임)’ 사이트를 통해 낯선 이들과 한솥밥을 나눠 먹는 모임이 유행인 것도 모두 엄마의 손맛과 집밥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사회가 팍팍해지면서 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방증이다.
 

청담동 퓨전 한식 '밍글스' 내부.
청담동 퓨전 한식 '밍글스' 내부.
한식은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확실한 키워드가 됐다. 일명 ‘미각의 시대’, 사람들은 점차 맛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특히 건강 먹을거리를 선호한다. 늘어가는 1인 가구 시대, 밥상의 정을 그리워하는 개인들은 TV의 ‘먹방’을 보며 대리 만족하고 보는 것을 넘어 따라 만들고 싶어 한다. 이와 관련해 스타 셰프가 늘고 있다는 점도 한식 열풍의 한 배경이다. 8도 지역 대표들의 요리 경영 프로그램 ‘한식대첩’의 심사위원으로 최현석 셰프, 백종원 요리 연구가가 등장하는 등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셰프들이 자주 얼굴을 비친다. 한식을 각양각색으로 재해석하고 창의적인 조리법이 소개된다. 유명 셰프들을 통해 한식의 매력을 접하면서 한식을 새롭게 바라보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한식 디저트, 한식 주점도 인기

‘한식의 재해석’은 올해의 외식 키워드이기도 하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외식 소비자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15년 외식 트렌드 3대 키워드 중 하나가 한식의 재해석이었다. 전통 한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현대화된 콘셉트에 맞춰 세련되고 모던하게 재해석한 것으로, 전통적인 요소를 통해 건강한 음식의 이미지를 주는 동시에 감각적인 인테리어나 캐주얼한 서비스 방식을 접목한 새로운 범주의 외식 트렌드를 말한다.

소비 시장에서는 ‘한식 다이닝’도 주목받는다. 특히 청담동을 중심으로 모던 한식, 퓨전 한식 등이 핫 플레이스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퓨전 한식을 선보이는 ‘밍글스’, ‘정식당’, ‘이십사절기’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엔 젊은 오너 셰프들이 가세한다. 해외 유명 요리학교 출신들이 속속 귀국해 오너 셰프 식당을 열고 있는데, 한식을 기본으로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말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셰프 르네 레드제피가 방문길에 찾았던 밍글스는 ‘한식을 기본으로 한 아시안 창작 요리’를 모토로 된장에 24시간 쟁인 양갈비 등으로 한식의 변주를 꾀하고 있다. 모든 요리는 3만~8만 원 사이 코스로 운영된다. 강민구 오너 셰프는 한식을 만드는 젊은 셰프들이 늘고 배경에 대해 “가장 익숙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음식을 하는 것”이라며 “국제무대에서 한국인 셰프가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은 한국적인 요소를 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학파 셰프들이 한식을 무기로 다시 해외시장 진출을 꾀하면서 한식 세계화에도 작은 물꼬가 트이고 있다. 정식당은 한국과 뉴욕에 동시에 한식 다이닝을 운영 중인데, 2014년 미국 뉴욕판 미슐랭가이드에서 2스타를 받았다. 또한 ‘2014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 한식당으로선 최고 순위인 20위에 이름을 올렸다. 임정식 정식당 오너 셰프는 미국 CIA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최고 프렌치 레스토랑 ‘불리’와 스페인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아케라레’ 등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식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정혜경 교수는 “오너 셰프가 주축이 돼 모던 한식을 선보이면서 푸짐하기만 했던 한식의 이미지가 세련돼 졌다”며 “한 축에서는 한식 다이닝으로 한식의 이미지 격상을 꾀하고 다른 한 축에서는 합리적 가격의 한식 뷔페로 한식의 대중화를 열었다는 점의 의미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축에서는 최근 ‘1인 한 상 차림’ 밥집도 뜨고 있다. 1만 원 전후의 가격이면서 기존 백반집과는 차별된 ‘집밥 표방’ 밥집이 주목 받는다. 가로수길의 ‘쌀가게 by 홍신애’, 한남동의 ‘빠르크’, 성북동의 ‘무명식당’, 성수동의 ‘소녀방앗간’ 등이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상차림을 선보인다. 밥과 국 한 그릇, 김치와 밑반찬 등이 깔끔한 1인 트레이에 올려 나온다. 새로울 것 없는 밥이지만 조미료 없는 건강 밥상, 엄마 밥상이라는 새로운 느낌을 주며 인기몰이 중이다.

한식의 기본은 ‘밥’이지만 디저트의 세계도 다채롭다. 한식 열풍은 한식 디저트로도 옮겨 붙었다. 지난해 이후 외식 업계에서 각양각색으로 활용되고 있는 ‘팥’이 대표적이다. 팥빙수·팥빵 등이 위축된 창업 시장에 새로운 아이템으로 등장했다.

전통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는 ‘한국형 디저트 카페’도 주목 받는다. 서울 명륜동에 있는 ‘다미재’는 매장 안에 직접 방앗간을 두고 한국 전통의 차와 디저트를 선보인다.

수라상에 올라가던 타락죽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찹쌀푸딩’을 선보이고 각종 정과·약과·한과와 함께 우리 차를 내고 있다. 조성희 다미재 대표는 “한식의 기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양하게 각색을 시도하고 한식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선보이는 한식 디저트의 종류는 무려 100여 가지에 이른다. 서양 디저트 부럽지 않은 한식 디저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한식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술’이다. 한식 열풍이 불면서 덩달아 ‘우리 술’에 대한 관심도 올라가고 있다. 막걸리가 주춤한 사이 전통주가 새 시장을 열고 있는 중이다. 앞서 말한 밍글스에서는 전통주인 매실주를 요리에 활용하고 술 메뉴로도 판매하고 있다. 한식 안주를 기본으로 전통주를 선보이는 한식 주점도 늘고 있다.

이파리·얼쑤·세발자전가·셰막 등이 성업 중이다. 비비고 다담·경복궁·백제원·이로울리·오늘과 같은 대형 한식 레스토랑에서도 전통주를 확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통주가 새롭게 조명되며 양식과 중식 레스토랑에서도 전통주를 활용한다. 한식 및 술 전문가인 이지민 씨는 “이탈리안 유명 셰프인 박찬일 씨가 레스토랑에 문배주를 선보이는 등 한식과 어울리는 전통주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한경BUSINESS 1003호 제공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