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벤처, 정권에 승부걸지 말라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 피터 틸은 ‘제로투원(Zero to One)’에서 ‘통념에 반(反)하는 견해’를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미래에 대한 도전도 여기서 시작한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게 틸의 주장이다. 예컨대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 버블이었다는 1990년대 인터넷 광풍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렇다.

“기술에 버블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1990년대는 자만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0에서 1로의 진보를 믿었다. 하지만 1에 도달한 벤처기업은 몇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저 떠들기만 하다가 끝이 났다. … 2000년 3월 (나스닥)시장 고점은 분명 무모함이 정점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먼 미래를 내다보았고, 그 미래에 제대로 안착하려면 훌륭한 신기술이 얼마나 많이 필요할지도 알고 있었다. … 우리에게는 아직도 신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신기술을 확보하려면 1999년 식의 자만과 과열도 약간은 필요할지 모른다.”(피터 틸, ‘제로투원’)

코스닥 상승, 창조경제 효과?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 미래에 대한 명확한 낙관주의가 엿보인다. 그 어디에도 정부에 대한 원망이나 요구 따위는 언급조차 없다. 버블 붕괴 후 미국 나스닥이 조정기를 거쳐 원상회복하는 데는 결코 식지 않는 벤처기업가들의 이런 위험 감수가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코스닥이 600선을 왔다 갔다 하면서 또 주목을 받고 있다. 벌써부터 누구는 ‘창조경제’ ‘핀테크(금융+기술)’ ‘180조원 규모의 정책금융’ 등에 힘입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 누구는 2000년 3월 코스닥 고점을 떠올리며 당시 정부가 웬만하면 벤처기업이라고 도장 찍어주던 벤처인증제 등을 복원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버블 붕괴 후에도 미래에 대한 명확한 낙관주의로 버티며 오로지 시장만 보고 신기술 도전을 계속했던 벤처기업들은 제대로 부각이 안 되고 있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코스닥 부활의 진짜 열쇠를 쥔 기업들인데도 말이다.

지원보다 규제개혁이다

국내에서 벤처 논의는 늘 이런 식이다. 정부가 지원하면 코스닥이 뜨고, 정부가 지원을 안 하면 코스닥이 진다는 건가. 버블 붕괴 후 코스닥이 좀체 회복하지 못한 데는 우리만의 이유도 있다. 시작부터 정부의 무리한 오버슈팅이 문제였다. 그 후 황우석 신드롬, 녹색 벤처 등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른바 정책 테마주, 정치인 테마주 등이 시장의 자율 조정을 넘어서는 깊은 상처를 코스닥에 남겼다. 이런 일이 현 정권에서 또 되풀이되면 코스닥은 진짜 가망이 없게 된다.

벤처는 틸의 말대로 언젠가는 0에서 1로의 진보를 이룩해 낼 기업들이다. 코스닥이 이런 기업들의 자유로운 무대가 될 수만 있다면 가만 놔두어도 회복은 시간문제다. 정부가 나서면 코스닥을 얼마든지 띄울 수 있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현 정부가 창업국가 이스라엘을 떠들지만 정작 에후드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의 성공이 정부의 잘된 정책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충고한다. 벤처도 일반 중소기업과 다른 DNA를 가졌다면 정부 지원에 연연할 게 아니라 차라리 과감한 규제개혁을 요구하라. ‘정권’이 아닌 ‘시장’에 승부를 걸게 해 달라고 말이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