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현대속도 vs 현대2.0
‘현대속도’라는 단어가 있다. 2004년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 등록된 단어다. 현대자동차의 빠른 성장을 일컫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현대차가 2002년 중국 베이징에 합작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후 2개월 만에 첫 차를 생산하고, 이후 놀랄 만한 속도로 성장하자 중국 언론들이 이런 단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현대속도는 중국인만 놀라게 한 게 아니다. 현대차에 근무하는 직원들조차도 놀라고 있다.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한 1998년 당시 두 회사의 연간 판매량 합계는 263만대였다. 세계 10위였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2000년 계열분리 후 임직원들에게 “10년 내 글로벌 5위로 가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임직원들도 설마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현대·기아차는 글로벌 5위에 올랐고, 지난해엔 800만대 판매 목표까지 달성했다. 이제는 ‘글로벌 톱3’를 넘보고 있다. 현대차 직원들도 “현기증이 날 정도”라고 말한다.

고속성장 후유증에 고전

고속성장의 배경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과감한 기아차 인수, 고집스런 품질 우선주의, 전격적인 미국·중국 공장 건설 등 고비마다 뚝심과 역발상으로 위기를 기회로 되돌려 놓은 리더십이 주효했다. 때마침 경쟁 일본차들이 엔고와 대규모 리콜사태, 대지진과 홍수 등으로 흔들렸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압축성장의 일시적 후유증일까, 아니면 성장의 한계일까. 고속 질주하던 현대차가 최근 눈에 띄게 힘겨워하는 모습이다. 사내하도급과 통상임금·연비과장 등의 문제로 겹치기 소송에 걸려 있고, 내수시장에선 수입차 공세에 밀려 15년 만에 처음으로 점유율이 70% 밑으로 떨어졌다.

해외서도 현대·기아차는 고전하고 있다. 엔저로 원기를 회복한 일본차들과 고연비·친환경 기술로 무장한 독일차, 미국 경제회생으로 힘을 되찾은 미국 자동차업체들의 공세가 거세다. 최대 격전지인 미국에서 현대·기아차의 지난해 시장 점유율이 4년 만에 7%대로 미끄러졌다. 중국과 인도 등 일부 지역에서 선전했지만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현대·기아차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0조1225억원으로, 2010년 이래 최저였다. 전체적으로 ‘내우외환’이다.

‘현대2.0’단어도 나왔으면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최근 미 디트로이트 자동차쇼에서 기자들을 만나 이 같은 상황을 ‘비상사태’로 표현했다. 이런 소식은 우울하다. 가뜩이나 전자 조선 화학 건설 철강 등 한국 대표 업종들이 ‘실적악화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터다.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자동차라도 잘 버텨줬으면 하는 게 국민들의 바람이다.

현대차그룹은 81조원의 투자계획, 해외 인재 영입, 대규모 배당 방침 등 하루가 멀다하고 굵직한 뉴스를 내놓고 있다. 분위기 반전을 노리는 듯하다. 그런 노력이 어떤 효과를 거둘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만큼 국내외 경영 환경이 녹록지 않다.

정 회장은 15년 전 ‘글로벌 톱 5’ 비전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쳐 있는’ 현대차그룹과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만한 비전은 없을까. 그 비전을 중심으로 임직원이 똘똘 뭉쳐 지금의 어려움을 훌훌 털고 새로운 단계로 나갔으면 한다. 일본과 독일 자동차 메이커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현대2.0’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쓰는 것을 보고 싶다.

박수진 산업부 차장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