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재벌가 자녀들에 대한 시각은 엇갈린다. ‘금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부러움을 받는 존재인 동시에 질시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권의식에 젖은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는 일도 적지 않다. 최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재벌가 자녀에 대한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오너가 3·4세들이 체계적인 경영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제대로 된 경영수업을 받는 과정 없이 경영권을 물려받으면 해당 기업 입장에서 리스크(위험)가 커지기 때문이다. 오너에 대한 견제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철저한 경영수업만이 또 다른 ‘땅콩 회항’ 사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대부분의 재벌가는 엄격한 교육과정을 거치도록 한다. 일반 직원과 똑같이 공장 등 현장 근무를 시키는 데서 출발한다.
후계수업 '독한' 오너家들 "시작은 현장서, 눈칫밥도 먹어봐라"
○“철저하게 현장부터 훑어라”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장남 김남호 동부팜한농 부장(40)은 2009년 동부제철에 입사한 직후 충남 당진공장 아산만 관리팀으로 발령됐다. 미국 워싱턴대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치고 글로벌 컨설팅회사 AT커니에서 근무 경험을 쌓았지만 아버지 김 회장은 아들의 첫 근무지로 ‘공장’을 택했다. “경영을 배우기 전에 현장 경험부터 쌓아야 한다”는 뜻에서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의 장남 이규호 코오롱글로벌 부장(30)의 처음 직장도 공장이었다. 그는 2012~2013년 2년간 경북 구미공장에서 일했다. 이 부장은 당시 동료 직원들과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등 격의 없는 행동으로 ‘오너 아들 같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의 장남 정기선 상무(32)도 2009년 첫 직장생활을 울산공장에서 시작했다. 퇴근 후 동료들과 회사 주변 포장마차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는 등 소탈함을 보였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장남 허윤홍 GS건설 상무(35)는 GS칼텍스 신입사원 시절 입사 동기들과 함께 주유소 근무부터 시작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의 장남 장선익 동국제강 대리(32)는 2007년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4년째 해외 파견근무 중이다. 구본무 LG 회장의 장남 구광모 (주)LG 상무도 8년간 공장, 해외법인 등을 훑었다. 2012년 창원공장 근무 때 직원들과 똑같이 기숙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후계수업 '독한' 오너家들 "시작은 현장서, 눈칫밥도 먹어봐라"
○“남의 눈칫밥을 먹어봐야 한다”

박정원 (주)두산 지주부문 회장(52), 박지원 (주)두산 지주부문 부회장(49), 박진원 (주)두산 산업차량BG 사장(46) 등 두산그룹 4세 모두가 경영수업을 받기 전 다른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박정원 회장은 일본 기린맥주, 박지원 부회장은 미국 광고회사 매켄에릭슨, 박진원 사장은 대한항공이 첫 직장이다. 창업주의 교육철학 때문이다.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은 “남의 눈칫밥을 먹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 밑’에서 일을 해봐야 나중에 경영자가 됐을 때 부하직원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는 얘기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도 이런 방식으로 자녀 교육을 했다. 박 회장의 장남 박세창 금호 타이어 부사장(39)은 그룹 입사 전 2000년부터 2년간 컨설팅회사 AT커니에서 근무했다. 고 이운형 세아그룹 회장의 장남 이태성 세아홀딩스 전무(36)도 2005년 포스코 중국법인 마케팅실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절약·경청·배려 등 엄격한 훈육도

부족한 것 없이 자란 만큼 3·4세의 근검절약과 검소함을 강조하는 교육에 엄격한 곳도 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평소 가족들이 무슨 차를 타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씀씀이가 과하지 않은지 살피는 것”이란 게 LG가 관계자의 전언이다. 심지어 LG가는 자녀·손자에 대한 ‘세뱃돈 상한제’를 만들었다. 검소함을 체득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김준기 회장은 아들 김남호 부장에게 한동안 월급 이외에 용돈을 한푼도 주지 않았다. 이웅열 회장의 장남 이규호 부장(30)과 두 딸은 아직 개인 차량이 없다. 꼭 필요한 경우 삼남매가 기아차 쏘울을 번갈아가며 이용한다.

‘배려’와 ‘경청’의 덕목도 재벌가 교육의 주요 포인트다. 세아그룹의 고 이운형 회장과 이순형 현 회장은 자녀들에게 어릴적부터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직원들과 진솔하게 소통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교육했다. 삼성가는 ‘경청(傾聽)’을 강조한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생전 직접 붓으로 쓴 경청이란 휘호를 이건희 회장에게 건넸고, 이 회장은 이를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 물려줬다.

박영태/이태명/남윤선/정지은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