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쿠바
“나흘 밤낮을 홀로 청새치와 싸운 늙은 어부, 고기를 배 위로 끌어올릴 수 없어서 뱃전에 묶어두자 결국 상어들이 그것을 먹어버린 이야기. 이건 쿠바 해안이 전해 준 멋진 이야기라네. 나는 곧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보려고 해. (…) 이건 훌륭한 이야깃거리야.”

1939년 쿠바에 있던 헤밍웨이가 미국 출판사에 보낸 편지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노인과 바다’가 완성됐다. 이 덕분에 그는 퓰리처상을 받았고 1954년 노벨 문학상의 영예까지 안았다. 쿠바 수도 아바나 부근의 작은 농장에서 집필과 낚시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이미 스페인 내전을 다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성공으로 쿠바 최고의 명사가 돼 있었다.

1959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피델 카스트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통해 게릴라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며 헤밍웨이를 향한 존경을 표시했다. 카스트로는 한때 헤밍웨이가 주최한 낚시대회에 참가해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 이듬해 헤밍웨이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두 ‘턱수염 스타’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후 카스트로는 ‘미완의 혁명’을 핑계로 반 세기 동안 독재를 펼쳤다. 그동안 냉전 시대의 미사일 사태로 미국과는 완전히 적국이 돼 버렸고, 혁명 동지인 체 게바라는 중남미 정글 속으로 돌아갔으며, 소련 붕괴 후엔 러시아의 원조마저 끊겨 고립무원 지경에 빠졌다. 이로써 쿠바는 혁명과 독재의 이미지로 각인됐다.

카리브해의 섬에 갇힌 주민들은 뿌연 시가 연기와 애수 짙은 재즈로 마음을 달랬다. 시가는 이곳 제품이 최고이니 진작부터 쿠바의 상징이 됐고, 쿠바 재즈 또한 워낙 뛰어나서 음감이나 남미 특유의 정열을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다. 빔 벤더스 감독이 쿠바의 음악적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다큐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만들 만했다.

독재의 그늘과 시가, 재즈의 빛 사이에 야구와 배구라는 스포츠 스타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한국 배구 코트에서도 레오와 산체스, 까메호, 시몬 등 쿠바산 ‘갈색 폭격기’의 활약은 눈부시다. 요즘은 한류 열풍이 쿠바의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다. 그러니 쿠바 이미지도 이젠 많이 바뀌었다.

마침내 미국과 쿠바가 단교 53년 만에 국교 정상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1년에 수십만씩 헤밍웨이 박물관을 찾는 미국인 관광객 덕분이었을까. 하긴 영원한 적은 없다. 쿠바는 2차대전 때 연합국이었고, 6·25 때도 우리에게 유엔 구호물자를 보낸 우방이었으니….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