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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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던 25세 청년이 스님이 됐다. 평소 절에 열심히 다니는 불자도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부처님 곁으로 이끌었다. 경기 남양주 봉선사에서 철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 젊은이는 평범한 승려의 길을 걷는 대신 전 세계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를 찾아오는 데 힘쓰고 있다. ‘승려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눈부시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반환(2006년), 조선왕실의궤 환수(2011년), 대한제국 국새(國璽) 반환(2014년) 등 한국 문화재 환수의 중요한 순간에 항상 그가 있었다. 지난 5월엔 ‘우리궁궐의 비밀’(작은숲 펴냄)이라는 책도 냈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로서 최근 한국협상학회가 주는 2014 대한민국 협상대상을 받은 혜문 스님(41) 이야기다.

진눈깨비가 쏟아지던 지난 15일 서울 경운동에 있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실에서 혜문 스님을 만났다. 2004년부터 문화재 운동을 하면서 세속의 일에 스님이 참여하는 것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혜문 스님은 “불경 공부와 기도만이 불교 수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돈과 권력을 뛰어넘는 진실의 힘을 믿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출가하고 문화재 운동가 된 것은 모두 우연

혜문 스님이 문화재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우연에 가까웠다. 출가 후 몇 년 동안 평범한 스님으로 살던 그는 2004년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 잠시 교토에서 지냈다. 그때 어느 고서점에서 집어 든 책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역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 일본 가쿠슈인대 명예교수가 쓴 ‘청구사초(靑丘史草)’를 통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도쿄대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선왕조실록이 도쿄대에 있다는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광복 60년이 다 됐는데 도쿄대가 이걸 지금까지 갖고 있다는 점과 아무도 돌려 달라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때 책 앞장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아 달라는 ‘저자걸정(著者乞正)’이란 구절을 읽었는데 저는 그걸 문화재 강탈 문제를 바로 잡아 달라는 부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1년이 넘는 자료 조사를 거친 뒤 2006년 3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환수 운동에 나섰다.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를 깰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도전이었다. 일본을 수차례 찾아간 끝에 도쿄대는 2006년 5월 오대산 사고본 47책을 서울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반환했다.

혜문 스님은 “제국주의 시대의 약탈 문화재가 운동을 통해 반환된 첫 번째 사건”이라고 말했다. 각계의 노력으로 이뤄낸 쾌거였지만 환수 운동을 시작할 때는 냉소를 보내다 정작 문화재가 돌아오자 저마다 자기 공인 양 행세하는 사람도 많았다. 스님은 “실록 반환 운동을 우리(환수위)가 전개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도쿄대밖에 없다는 우스개에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오바마가 가져온 국새 가장 기억에 남아

조선왕조실록 반환을 시작으로 그는 조선총독부가 1922년 일본 궁내청으로 빼돌린 조선왕실의궤 2105책을 2011년에 되찾는 등 지금까지 48건의 문화재 제자리 찾기에 성공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지난 4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가지고 온 대한제국 국새와 고종 어보(御寶) 등 조선 왕실이 쓰던 인장 9점을 돌려받은 것을 꼽았다.

“2010년 미국 메릴랜드에 있는 국가기록보존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6·25전쟁 중 서울에서 발생한 ‘미군 문화재 절도 사건’을 다룬 문서인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발견했어요. 이 문서엔 미군이 종묘와 궁궐에서 임금의 도장을 훔쳤고 한국 정부가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분실 신고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박물관(LACMA)에 조선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 어보가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박물관은 이 어보를 돌려주겠다고 2013년에 발표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미국 언론에 소개되자 제보가 하나 들어왔다. 미국에 또 다른 옥새(玉璽)가 있다는 것. 미국 국토안전부는 제보자의 신고를 받아 샌디에이고에서 9점의 인장을 추가로 발견했다. 6·25전쟁 참전 미군이 덕수궁에서 불법 반출한 것이었다. 국토안전부가 압수와 몰수 절차를 진행해 이 인장들은 지난 6월께 돌아올 예정이었다. 이때 혜문 스님이 기지를 발휘했다. 반환 시기를 앞당겨 오바마 대통령이 올 4월 한국을 방문할 때 직접 ‘선물’로 들고 오면 좋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6·25전쟁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는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문화재 반환 운동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 두 달 넘게 머무르며 한인단체, 미국 상원, 김진태 검찰총장 등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혜문 스님의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은 국내에서도 활발하다. 스님은 2012년 한국 절도범들이 쓰시마시에서 훔쳐온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불상을 일본에 되돌려줘야 한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7월 내려진 1심 판결에서 “원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당했고 혜문 스님은 항소했다. 절도범들은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불상은 몰수됐지만 이 불상을 일본으로 돌려줘야 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일본 간논지(觀音寺)에 있던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은 서산 부석사가 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해 대전지방법원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건 부석사에 있던 것이란 기록이 있으니 별개로 하더라도 가이진(海神) 신사의 동조여래입상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닌지도 몰라요. 바로 돌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일본이 약탈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돌려주면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죠. 이건 도난 사건입니다. 도난 사건에 민족 감정이 더해지니까 오히려 일본이 그걸 이용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혜문 스님은 이 또한 문화재 제자리 찾기란 신념을 갖고 있다. 그는 “사람들 마음은 이해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은 도둑질한 것을 취하지 말라는 뜻도 있다”며 “정당하게 돌려준 뒤 정당하게 반환 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재 환수 운동 30代가 참여해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문화재 환수 운동은 외로운 싸움이다. 국제적 활동이다 보니 경비 부담도 적지 않은 데다 ‘무슨 다른 목적이 있어 하는 일 아니냐’는 눈초리도 감내해야 한다. 혜문 스님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나서서 하니까 좋게 보이진 않을 것”이라며 “문화재청과의 소송에서 패소하자 문화재청이 변호사비 150만원을 바로 청구한 적도 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 도산서원에 심은 금송(金松)이 2년 만에 말라 죽었는데 안동군이 같은 수종을 구해 몰래 심은 일이 있다. 금송마저 일본 특산종이라 논란이 됐다. 이 사실을 밝혀낸 혜문 스님은 국가를 상대로 금송 이전과 위자료 1000원을 요구하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나무가 다시 심어진 점은 인정하나 이에 대해 이전과 피해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人사이드 人터뷰] 혜문 스님 "계란으로 바위 깨보자…조선왕조실록 日서 찾아왔죠"
그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50건을 이루면 실무에서 물러나 후배들을 양성할 계획이다. 보스턴미술관 라마탑형 사리구 반환, 오구라 컬렉션 반환 운동 등 산적한 문제가 많지만 두 건만 더 채우면 평범한 수행자의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 그는 젊은이들이 문화재 운동을 이어가기를 희망했다. “문화재 환수 운동은 30대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20대는 너무 젊어서 식견과 역량이 부족하고 40대가 하기엔 여러모로 버겁기 때문이죠. 30대들이 이 운동에 참여해 제가 그만둬도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 작은 바람입니다.”

■ 혜문 스님이 ‘국보 1호’ 바꾸려는 이유
‘숭례문은 日 장군이 지나간 문’
조선총독부가 ‘보물 1호’로 지정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서명 운동


혜문 스님은 지난달부터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을 국보 제1호로 지정하자는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7000만명에 이르는 한반도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 훈민정음”이라며 “이 문제가 광복 70주년인 2015년 안에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혜문 스님이 국보 1호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경 이야기는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혜문 스님은 “일제 강점기 한성신보 사장이자 일본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가 철거 위기에 놓인 숭례문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간 문’이란 이유로 철거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 1934년 조선총독부가 숭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했다는 설명이다.

국보 번호 변경 논의는 1996년과 2005년 두 차례 있었지만 국보 1호를 바꾸면 국보 관리 체계에 혼란이 온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윤순호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은 “국보 번호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받고 있다”며 “국보 번호는 우열이 아니라 관리 번호라는 것이 청의 기본 입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혜문 스님은 “사람들이 국보 1호는 모두 알겠지만 100호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1번이란 숫자는 큰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문화재를 국보 1호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숭례문은 국보로서의 가치가 우수하므로 굳이 번호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일각에서는 국보의 지정 번호를 모두 없애고 ‘국보 숭례문’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 등으로 바꾸자는 절충안도 나오고 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