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배임죄를 단두대에 올려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한국전력 본사 부지를 감정가보다 비싸게 매입한 문제 때문에 배임 혐의로 피소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현대차의 한 소액주주가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정 회장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했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형법전을 보면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 처벌하는 범죄다. ‘임무에 위배’니 하는 법조문부터가 애매하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우려가 크다는 얘기다. 실제 대기업 총수들은 그동안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 하면 그 경위야 어찌됐든 일단 배임 혐의로 몰렸다. 정 회장에 대한 무분별한 고발은 검찰과 법원이 배임 혐의를 남발해온 것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다.

'기업천국'서 경영판단원칙 확립

법조문을 달달 외워 사법시험에 합격한 검사나 판사들이 기업인의 경영판단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는 판사들이 “우리는 경영판단을 평가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회사 경영진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신의성실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렸다면 회사 이익을 위한 결정으로 추정한다. 그로 인해 비록 회사에 손해를 끼쳤더라도 형사적 책임을 면제해준다. 이것이 ‘경영판단의 원칙’이다. 미국에서 이 원칙이 1984년 판례로 확립된 곳이 델라웨어 최고법원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델라웨어는 작은 도시인데도 ‘기업 천국’으로 불린다. 법인세 등 각종 혜택이 많아 전 세계 기업들이 앞다퉈 주소지를 두는 곳이다. ‘경영판단의 원칙’도 이런 기업 친화적 분위기에서 자연스레 도출된 것이다. 한국의 기업 정서는 어떤가. 얼마 전 한 검찰 간부에게 가석방 요건을 물어봤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법상으로는 형기의 3분의 1만 채우면 요건이 되지만 요즘엔 기업인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차원에서 형기의 80%인 일반인보다 더 엄격하게 형기의 90%를 채우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기업인 역차별’의 한 단면이다.

사적자치 영역에 국가개입 안돼

우리 형법상의 배임죄는 다른 법조문과 마찬가지로 독일과 일본을 거쳐서 왔다. 연혁적으로 보면 나치시대(1933년)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1940년)에서 사회 기강을 엄격히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 독일에서도 2005년 주식법에 경영판단 원칙을 명문으로 도입했다. 이에 따라 우리도 배임죄를 폐지할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소한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조문으로 명문화할 필요성에 대해선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이명수 새누리당 의원 등 여야 의원 10명이 작년 3월 이런 내용이 포함된 상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국회에 냈으나 법사위에서 안건이 낮잠을 자고 있다.

대형로펌의 변호사들은 배임죄를 기업들의 신규 투자에 가장 큰 걸림돌로 지목하고 있다. 국가가 언제까지 민간의 사적자치 영역에 개입해 감놔라 배놔라 할 건가. 기업가 정신을 북돋우지는 못할 망정 역차별로 위축시키는 일은 그만 뒀으면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규제들을 단두대에 올려서 처리하겠다고 규제개혁을 역설했다. 법조계의 대표적 규제인 배임혐의 논란에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

김병일 사회부 차장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