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무역보험공사 보증서 누가 믿겠나
또 터졌다. 무역보험공사와 시중은행이 또 허위 서류에 놀아났다. 이번엔 빌 게이츠도 극찬했다는 벤처기업 모뉴엘이다. SLS라는 중소 조선사에 1조원 가까이 물린 게 고작 5년 전이다. 수출금융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고 법석을 떨었지만 고쳐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또 터질 일이었던 셈이다.

무보와 은행은 서로 변명을 늘어놓는다. 무보는 은행에서 받은 서류를 토대로 보증서를 떼어줬다며 은행에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하지만 은행들은 무보 보증서를 믿어야지 어떻게 일일이 컨테이너를 확인하느냐며 볼멘소리다. 책임이 가려지겠지만 무보의 변명이 더 군색하게 들린다.

골탕을 먹는 건 중소 수출업체다. 수출 자금은 한시가 급한데 은행들은 이제 무보 보증서를 휴지 조각 취급할 테니 말이다. 무역과 해외투자를 촉진하겠다며 세운 정부 기관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무보에 대한 비난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1992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입은 손실이 무려 3조3000억원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관이 아니라지만 연평균 1700억원이라는 거액이 정부 재정으로 메워진다. 국민의 혈세다.

무보를 들여다보면 심사부터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서류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이번 사건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난 사실이다. 초기 한도를 설정할 때야 규모가 크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한도 증액 때도 마찬가지다. 수입업체에 대한 신용조사도 철저히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D&B 같은 기업정보회사의 자료나 건성으로 훑어보는 게 전부일 때가 많다.

SLS조선 사건도 그랬다. 한 해 선박건조능력이 17척에 불과한 회사였다. 25척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보증을 해줬다가 실적이 9척에 그쳤다. 6000억원 가까이 물어줘야 했다. 도크도 없는 조선소까지 보증을 해줬다는 건 진기명기에나 나올 얘기다. 괜히 70조원 수출금융에 구멍이 뚫렸다는 얘기가 나오겠는가.

부실한 심사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이 모럴 해저드다. SLS조선 사건 때도 주요 간부들이 줄줄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보증 한도를 늘려주는 대가로 억대 뇌물을 받아서다. 간 큰 한 간부는 아예 회사를 SLS 계열사로 옮기면서 10년 고용에 연봉 2억5000만원을 보장하는 ‘철밥통’ 수준의 고용계약까지 맺었다니 기가 찰 일이다.

아랫물이 괜히 혼탁하겠는가. 한 전직 사장은 자식의 유학비용 1억원을 보증 기업에서 뜯어낸 혐의로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규정을 고쳐가며 편법으로 보증을 서줘 감사원 문책을 당한 사장도 여럿이다. 이번 사건이라고 다르겠는가. 검찰이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관련자들은 벌써 해외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비전문가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최고경영자(CEO)를 맡는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이들이 대부분이다. CEO만이 아니다. 산업부에서 엉뚱한 일을 맡던 공무원이 내려와 리스크관리본부장을 맡는 곳이 무보다. 리스크 관리가 되겠는가. 엄연한 금융의 영역이다. 비전문가들이 머물 곳이 아니다. ‘산피아’들의 은퇴자금 마련 창구라는 비아냥이 괜한 것이겠는가.

무역금융 시스템은 망가졌는데 밥그릇 다툼은 여전하다. 무보와 수출입은행 등의 영역 다툼은 치열하고 관할권을 놓고 산업부가 금융위원회 기획재정부 등과 벌이고 있는 공방전은 처절하다. 감사원이 보다 못해 무보, 수은 등의 업무가 중복돼 비효율이 발생한다며 국무총리실장에게 기능 재조정 방안을 마련하라고 통보했다. 지난해다. 그러나 변화는 없다.

정책 수출금융기관이 대출-보증-보험의 영역을 각각 쪼개는 게 좋은지, 합치는 게 좋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건 조직이기주의에서 나오는 소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최소 비용으로 기업들의 수출과 해외투자를 돕는다는 정책 목표다. 결코 공무원들과 정부기관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가 아니다. 모뉴엘 사건이 기회다. 비리 색출은 물론 근본적인 구조개편이 있어야 한다. 제2, 제3의 모뉴엘 사건이 또 터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