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이어 제철사업까지…이 악물고 떠나보낸 김준기 회장
지난 8일 오후 5시 서울 대치동 동부그룹빌딩.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발송한 경영정상화계획 이행약정(MOU) 초안이 동부제철에 도착했다. 곧바로 34층 회장실에 있던 김준기 회장에게 문서가 전달됐다.

약정서 초안에는 김 회장 지분에 대한 차등 감자(100 대 1) 방안과 함께 충남 당진의 열연 전기로 공장 가동을 중단할 것이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40년 동안 키워온 철강 부문의 주력사를 잃게 되는 만큼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제철사업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없었다. 22일 약정서에 서명한 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이루지 못한 원료자립의 꿈

반도체 이어 제철사업까지…이 악물고 떠나보낸 김준기 회장
김 회장은 산업의 쌀인 ‘철강’과 정보기술(IT)의 핵심인 ‘반도체’ 사업에 유독 많은 애착을 보였다.

1984년 동진제강을 인수한 뒤 이름을 바꾼 동부제철은 이후 줄곧 그룹의 핵심 제조 계열사로 자리매김해왔다. 당진에 전기로 사업을 추진할 때도 주변에선 한사코 만류했지만, 김 회장은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고철 자원을 철강으로 만들어 국가 경제 발전은 물론 후손에게도 기여할 것”이라며 뚝심으로 사업을 밀어붙였다.

2009년 7월1일 완공한 전기로 일관제철소를 건설하는 데 총 1조3000억원이 투입됐다. 하지만 철강 공급 과잉과 주원료인 고철가격 상승 등으로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면서 회사 빚은 2조원을 넘어섰다.

이번 협약에 따라 김 회장과 특수 관계인의 지분에 대해 100 대 1 차등 감자를 하면 계열사와 함께 총 36.94%의 지분을 갖고 있던 김 회장은 경영권을 잃는다. 산업은행은 사재 출연을 하지 않으면 우선매수권도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김 회장의 손을 영원히 떠날 가능성도 크다.

시스템반도체 업체인 동부하이텍도 매각 절차를 진행 중이다. 김 회장은 반도체 꿈을 이루기 위해 3조원 넘는 자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업황 부진으로 투자한 사업들이 적자 늪에 빠져들면서 결국 ‘산업보국’의 꿈을 접게 됐다.

◆동부건설 처리 주목

동부그룹의 모태격인 동부건설 처리도 재계의 관심거리다. 동부하이텍과 동부제철을 잃은 김 회장은 자력으로 동부건설을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다. 유동성 문제만 해결하면 독자 생존이 가능하다는 게 동부 측 주장이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벌써부터 워크아웃 혹은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1969년 김 회장이 20대의 나이로 창업한 동부건설(옛 미륭건설) 경영권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동부건설의 운명은 다음주 채권단과 동부건설이 함께 진행한 실사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 회생 가능성도 있지만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도 배제할 수 없다.

30대 그룹 중 거의 유일한 창업 경영인인 김 회장이 그동안 공들여 키워온 제조 계열사들이 하나둘 그의 손을 떠나고 제조업체는 동부대우전자, 동부메탈만 남게 됐다. 김진만 전 국회부의장의 아들인 그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젊은 시절부터 기업가의 길을 걸었다. 대학 재학 시절인 1969년 미륭건설을 창업해 20대 중반의 나이에 대표이사를 맡았다.

1970년대 초반 일찌감치 중동 건설 시장에 눈을 뜬 그는 미륭건설의 해외수주 실적을 바탕으로 재원을 모아 동부고속, 동부상호신용금고 등을 세우고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을 인수하면서 그룹 외형을 비약적으로 키웠다.

최진석/박종서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