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새벽 5시께 서울 신대방동에 있는 보라매병원 응급실에서 술에 취한 여성이 고성을 지르며 소란을 피우자 경찰관들이 이를 말리고 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26일 새벽 5시께 서울 신대방동에 있는 보라매병원 응급실에서 술에 취한 여성이 고성을 지르며 소란을 피우자 경찰관들이 이를 말리고 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1만5000명 다녀갔지만…
알코올 중독관리 서비스
이용자 100명도 안돼

취객 난동에 멍드는 의료진
상주하는 경찰관 있으나 마나

年 예산 2000만원 이하
상담사, 오후6시까지 근무
“지속적 치료 불가능”
美처럼 주취해소센터 설립해야


지난 24일 오후 8시께, 서울 을지로6가에 있는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의료센터에 들어서자 요란한 고성이 울렸다. 술에 취한 한 50대 남성이 상의를 풀어헤친 채 응급실을 헤집고 다니며 의료진에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책상과 벽을 발로 차기도 했다.

30분간 계속된 행패는 보안요원과 경찰이 이 남성을 제압해 병원 정문 밖으로 끌어낸 뒤 간신히 마무리됐다. 현장에 있던 의료진은 “만취한 상태로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한 취객”이라며 “엑스레이와 혈액검사를 한 뒤 결과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6일 오전 5시 신대방동의 서울대 보라매병원. 경찰과 함께 응급실로 들어선 술 취한 50대 여성이 의자에 걸터앉더니 “나 그만 살래”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보호자와 연락하기 위해 이 여성의 휴대폰을 살펴보려는 경찰관을 향해 “당신이 뭔데 내 휴대폰을 만지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소동 끝에 119구급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로 향하던 여성은 술을 못 이겨 유리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쓰러졌다. 익숙하다는 듯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의료진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알코올 중독자를 조기 발견해 치료하고, 각종 사고와 범죄에 노출된 주취자(술에 취한 사람)를 보호하겠다”며 서울시와 경찰이 도입한 ‘주취자 원스톱 응급의료센터’(주취자 원스톱센터)가 당초 취지와 달리 술취한 사람들의 ‘임시보호소’에 머물고 있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경찰이 의학적 치료가 필요 없는 단순 취객까지 무턱대고 응급실로 데려오면서 일부 주취자가 의료진에 폭력을 행사하거나 난동을 피우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병원 응급실 본래의 기능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게 병원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의료진은 “제도 취지엔 공감하지만 응급실에서 중환자와 술 취한 사람을 같은 공간에서 치료 받게 하는 것은 무리”라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취객 ‘임시보호소’로 전락

[경찰팀 리포트] 취객 보호한다던 응급의료센터, 폭력 난무하는 '酒暴 놀이터'로 전락
주취자 원스톱센터 제도는 2012년 7월 도입돼 시행되고 있다. 경찰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정신을 놓은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으면 현장에 출동해 119구급대와 함께 원스톱센터로 지정된 병원의 응급실로 취객을 이송한다. 취객이 도착하면 의료진은 혈액검사 등을 거쳐 환자의 상태를 파악해 치료한다. 알코올중독자에겐 퇴원 전 상담을 통해 지역정신보건센터와 알코올상담센터에서 치료받도록 주선해 준다. 보라매병원, 국립중앙의료원, 서울의료원, 서울동부병원, 적십자병원 등 5개 병원이 참여하고 있다.

경찰청은 최근 주취자 원스톱센터를 부산 인천 대구 등 6개 광역시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지난 3년간 원스톱센터를 거쳐간 주취자가 1만5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과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같은 확대 방침에 대해 의료계에선 “단순히 이송자 숫자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제도의 원래 도입 목적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취객들이 잠시 머물다 갈 뿐 제대로 된 치료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3년간 원스톱센터를 다녀간 1만5000여명 중 9000여명이 최소 2회 이상 이송된 사람들이다.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는 취객 비중이 그만큼 높다.

하지만 이들 중 지역정신보건센터나 알코올 중독 치료병원에서 서비스를 받은 사람은 2012년 33명, 2013년 37명, 2014년 23명 등에 불과했다. 박태진 국립중앙의료원 재난응급의료지원팀장은 “똑같은 환자가 하루 세 차례나 경찰과 함께 찾아와 치료를 받고 간 적도 있다”며 “수액 투여 등 기본적인 치료 뒤 돌려보내면 같은 사람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다시 만취해 돌아오는 현재 시스템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고 지적했다.

상주 경찰관 제 역할 못해

원스톱센터에 상주하는 경찰관이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경찰은 제도 시행과 함께 취객의 난동과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보라매병원 국립중앙의료원 서울의료원 등 세 곳에 경찰관이 상주하도록 했다. 지난해 2월엔 상주 경찰관 수를 1명에서 2명으로 늘렸다. 그런데도 응급실 의료진이 취객에게 맞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한 병원의 응급의료센터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는 “지난 4,5월에 전문의와 레지던트 의사가 취객을 치료하던 중 폭행당해 경찰서에서 피해자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일부 병원에서는 상주 경찰관이 취객 난동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 일이 잇따르자 의료진이 이와 관련된 일지를 만들고 있을 정도로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제복을 입고 응급실을 계속 돌아다니면 일반 환자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 병원 응급실에서 취객이 30여분간 난동을 부렸지만, 상주 경찰관은 취객이 보안요원에게 끌려나와 퇴원 수속을 밟을 때가 돼서야 현장에 나타났다.
[경찰팀 리포트] 취객 보호한다던 응급의료센터, 폭력 난무하는 '酒暴 놀이터'로 전락
상담 인력도 예산도 부족

병원 응급실이 취객들의 ‘임시보호소’로 전락한 중요한 요인으로 이송된 주취자들을 알코올 중독 치료 및 상담 기관과 연결해주는 전문인력과 예산 부족이 꼽힌다. 원스톱센터로 지정된 병원 응급실 5곳엔 서울시가 파견한 상담사 6명이 배치돼 있긴 하다. 주취자가 이송돼올 경우에는 중독 치료·상담 기관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하지만 상담사들은 주취자는 물론 응급실을 찾아오는 노인, 노숙인, 성폭력 피해자, 자살 시도자 등 취약계층 환자에 대한 상담까지 맡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와 치료기관을 연결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이유다. 취객들이 주로 몰리는 밤 시간대에는 근무하지 않아 상담을 담당할 인력이 없다. 김용진 구로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장은 “알코올 중독자들은 병원 응급실에 실려와선 치료와 상담에 호응하다가도 퇴원하면 상담을 거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지금 시스템으로는 지속적인 치료가 어렵다”고 꼬집었다.

관련 예산도 ‘쥐꼬리’다. 서울시가 책정한 원스톱센터 관련 예산은 2012년 2000만원, 2013년 2400만원, 2014년 1700만원 등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대부분 노숙인 등 치료비를 부담할 수 없는 환자들에 대한 치료비 지원에 쓰이고 있다.

별도 공간에서 관리·치료해야

경찰서와 파출소엔 술에 취한 사람들을 위한 ‘주취자 안정소’가 있었다. 하지만 술에서 깬 시민들의 거센 항의와 인권침해 논란, 주취자 안정소 내에서의 사망 사고까지 겹치자 경찰은 2010년 주취자 안정소를 없앴다. 이후 의료진의 검진과 치료가 가능한 응급실에서 주취자를 보호하려는 취지로 원스톱센터가 도입됐다.

이성현 경찰청 생활질서계 경감은 “취객 한 명의 귀가를 위해 순찰차 한 대가 몇 시간 동안 순찰을 돌지 못할 정도여서 치안력 낭비가 심각하다”며 “현재로선 병원으로 이송해 보호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미국 캐나다 등에서 운영 중인 주취해소센터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중환자를 치료하는 응급실에서 술 취한 사람을 보호하는 대신 별도의 전문시설을 두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김성중 대한응급의학회 법제이사는 “권역별로 주취자만을 전담하는 경찰 지구대를 만들어 의료진을 파견하거나 병원들이 공동으로 관련 시설을 설치하는 방법이 가능할 것”이라며 “주취자 보호와 알코올 중독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인력과 시설이 확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선표/오형주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