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완희 유림다이어리 사장이 서울 인현동 본사 매장에서 다이어리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원완희 유림다이어리 사장이 서울 인현동 본사 매장에서 다이어리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다이어리 만드는 일과 인쇄업은 다릅니다. 기업이 망하지 않는 한 기업의 홍보물인 다이어리도 망할 일이 없습니다.”

1976년 유림다이어리를 창업한 원완희 사장은 서울 을지로에선 ‘유림 아줌마’로 불린다. 하루종일 인현동 매장을 지키며 연간 100만권에 달하는 주문량을 실수 없이 제작해내는 원 사장을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원 사장은 “기한 내에 제품을 만들지 못하면 공장으로 당장 뛰어가서 ‘왜 납기를 안 맞춰주느냐’고 뒤집어놓기 때문에 공장에서도 우리 일부터 해줬다”며 “고객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1500여개의 단골 고객사를 확보, 을지로 다이어리 업계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다시 처음부터”

원 사장이 처음 창업했을 때는 인쇄업과 제지판매업, 인쇄 관련 재료상과 제본소 등 네 가지 사업을 동시에 했다. 남편에게 공장 등 제작 일을 맡기고 자신이 직접 고객사를 만나 거래하며 사업을 벌여나갔다. 그는 “따로 홍보하지 않았는데도 을지로 인쇄촌으로 찾아오는 기획사(소매상) 사이에서 ‘다이어리 종류도 많고 질도 좋은데 가격은 싼 편’이라는 입소문이 퍼졌다”며 “한때 70여명의 직원을 두고 연매출 70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활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빌딩을 하나씩 사모아 6개까지 늘었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자 제품을 주문했던 회사들이 갑자기 취소하기 시작했다. 원 사장은 “인쇄물과 다이어리 등은 하반기에 다음해 제품을 미리 만들기 때문에 주문량을 미리 생산해놓는데, 그중 절반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었다”며 “날짜가 찍힌 속지 등 종이는 쓸 데도 없기 때문에 30억원의 적자를 봤다”고 말했다.

그는 “채권자들을 만나 ‘다 갚을 테니 믿고 기다려달라’고 설득했다”며 “빌딩 다 팔고 네 개 사업을 정리하고도 돈이 모자라 다이어리 사업을 10년간 하면서 빚을 갚았다”고 회고했다.

○중국 공장으로 생산성 높여

원 사장은 유림다이어리를 다른 매장에 없는 디자인과 크기, 사양으로 차별화했다. 해마다 30여종의 디자인도 새로 만들었다. 그는 “꾸준히 팔리는 디자인이 있다 하더라도 해마다 새로운 걸 찾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만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미국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 아들이 다이어리 디자인을 해 ‘어디에도 없는 다이어리가 유림엔 있다’는 입소문이 퍼졌다”고 설명했다.

유림다이어리가 재기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비결은 생산성 향상이다. 경기 고양시에 자체 공장을 운영하면서 중국 업체와 계약을 맺어 대량 주문을 소화했고 원가도 낮출 수 있었다. 원 사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0만원을 종잣돈으로 택시 운수업을 직접 하고 개인 사업도 하는 등 내 회사를 운영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200만권으로 80억원 목표”

유림다이어리의 지난해 매출은 35억원이었다. 올해는 약 100만권 판매, 40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현대그룹과 한국도로공사 기상청 서울시의회 서울대 연세대 동부생명 메리츠증권 등 150여개 대학 및 기업·기관에서 이 회사와 거래하고 있다.

원 사장은 “스마트폰으로 일정을 관리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기업 홍보물인 다이어리 시장은 계속 성장할 것”이라며 “200만권의 다이어리로 80억원의 매출을 내는 게 단기 목표”라고 말했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