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태평1동 태평전통시장 안 채소가게 앞에서 삼형제가 환하게 웃고 있다. 장사하느라 형제가 함께 사진 찍은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던 삼형제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오른쪽부터 첫째 임승군 씨, 둘째 성빈 씨, 막내 태종 씨.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대전 태평1동 태평전통시장 안 채소가게 앞에서 삼형제가 환하게 웃고 있다. 장사하느라 형제가 함께 사진 찍은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던 삼형제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오른쪽부터 첫째 임승군 씨, 둘째 성빈 씨, 막내 태종 씨.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지난 15일 오전 6시 대전 중구 태평시장. 서울 가락시장을 출발해 경부고속도로를 달려온 5t 트럭이 들어서자 사형제 중 맏이인 임승군 늘푸른 과일나라 사장(45)의 몸놀림이 빨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 도매시장에서 출발한 트럭도 도착했다. 배추 양파 사과 포도 등 이날 하루 과일가게 한 곳과 채소가게 두 곳에서 판매할 수십 상자의 물건을 내리고 정리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7시께 둘째 성빈씨(43)와 막내 동생 태종씨(37)가 출근했다. 큰 형이 내려놓은 과일과 채소를 150여개 거래처별로 분류한 뒤 오토바이에 싣고 배달에 나섰다. 임씨 형제가 운영하는 가게 세 곳을 찾는 사람은 하루 300여명, 하루 매출은 300만원을 웃돈다.

2000년 생선가게 점원으로 태평시장에 발을 디딘 임 사장이 새벽 별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 지 15년째다. 그의 얼굴엔 요즘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2006년부터 아내와 두 아들, 둘째 부부와 조카, 막내 동생까지 모두 여덟 식구가 9.9㎡짜리 여인숙 방 세 칸에 모여 살다 지난 6월 초 시장 인근에 직접 지은 3층짜리 빌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임 사장은 “여인숙을 집으로 고쳐 살 때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15m 길이 복도를 왔다 갔다 했다”며 “세 달 전 결혼한 막내 동생에게 번듯한 신혼집을 마련해줘 뿌듯하다”고 말했다.

장애를 가진 부모 밑에서 사춘기를 겪을 새도 없이 일찍 철들어 버린 사형제다. 어린 마음에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지금은 이들 중 세 명이 같은 시장에서 과일·채소가게를 각각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다. ‘누구보다 가난했고, 차별받았기에 어려운 이웃을 모른 척할 수 없다’며 지역 독거노인들과 경로당에 꾸준히 나눔을 실천하는 ‘태평시장 삼형제’를 만났다.

부모의 장애…너무 일찍 철든 형제들

[형제의 대화] "이 무·배추가 우리 형제 살렸죠"
형제의 고향은 충남 금산군 명곡리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청각장애와 지체장애를 동시에 가진 2급 장애인이다. 임 사장은 “장애가 있는 부모님을 몰래 데려다 공짜로 부려 먹는 사람들에게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기도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기댈 언덕 하나 없던 형제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부모 역할을 해야 했던 임 사장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사리손으로 소를 끌며 써레질을 했다. 태종씨는 “중학생이던 큰형이 직접 키운 수박을 경운기에 가득 싣고 읍내로 팔러 나갈 때면 나도 옆에서 조수 노릇을 했다”며 “우리 형제에게 큰형은 부모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부모의 장애는 형제의 성장 과정에서 부담이 될 때가 많았다. 30여년 전만 해도 장애에 대한 편견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빈씨는 “군 복무 시절 부모님과 통화하는 선후임들의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며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면 옆집에 전화를 걸어 그저 잘 계시는지만 여쭙고 끊었다”고 털어놨다.

결혼도 쉽지 않았다. 임 사장이 의류회사에서 옷에 자수를 놓던 아가씨에게 반해 결혼하려 했을 때 처가의 반대가 심했다. 장애인 사돈을 마뜩잖아하는 장인, 장모를 설득해야 했다. 결국 보름 동안 아내가 임 사장의 집에 몸을 숨긴 끝에 결혼을 승낙받았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임 사장은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바깥세상에 눈을 떴다. 1989~1991년 27사단 공병대대에서 복무한 임 사장의 군대 선후임과 동기 대부분은 대학을 휴학하고 입대한 소위 ‘먹물’들이었다. 이들과 대화하며 세상엔 농사일 외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나도 대학 캠퍼스를 걸어보고 싶다’는 바람도 생겼다.

서울대 자원공학과를 나온 후임에게는 수학을, 국민대 영문과 출신 후임에게는 영어를 1 대 1로 과외받으며 8개월간 열심히 공부했다. 말년 휴가 때 학력고사를 봐 조선대 건축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부모님과 세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에게 대학은 사치였다. 임 사장은 “대학에 붙어도 어차피 등록금이 없어 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실망은 하지 않았다”면서도 “동생들만큼은 대학에 보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건 지금도 한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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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게 점원으로 시작한 시장 생활

군에서 제대한 임 사장은 대전으로 올라갔다. 공무원 시험을 봐 기능직에 합격했지만 책상머리에서 하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곧 그만뒀다.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식자재 유통회사에 들어가 일을 배워 몇 년 뒤 작은 가게를 차렸다. 당시 돈을 모으려고 3년간 독서실에서 쪽잠을 자며 생활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56㎡짜리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결혼해 아들도 낳았다.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찾아온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삶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래처들이 하나둘 문을 닫아 떼이는 돈이 점점 늘어났고 결국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아들은 심장병을 안고 태어났다.

벼랑 끝에 몰린 임 사장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지인이 소개해준 대전 중리시장의 한 생선가게였다. 절박함에서 나온 독기 때문이었을까. 생선가게 이병주 사장(48)은 지나치게 강해 보이는 임 사장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출근 시간보다 네 시간 일찍 집 앞으로 찾아와 함께 새벽 수산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며 장사를 배우려는 성실함에 이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임 사장은 “둘째 아들 치료비로 한 달에 100만원에서 많게는 300만원까지 들어 이를 악물고 일해야 했다”며 “사장님과 함께 새벽 수산시장을 다니면 사장님 차로 다닐 수 있어 교통비가 절약됐다”고 회상했다. 다행히 둘째 아들은 몇 번의 수술 끝에 건강하게 자랐다.

생선가게가 2000년 태평시장으로 옮겨가자 그도 함께 따라갔다. 6년 뒤 생선가게 맞은편에 자리가 났다. 가게만 열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목 좋은 자리였지만 돈이 부족했다. 어쩔수 없이 네 식구가 살던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은행에서 대출도 받았다.

가게 2층 여인숙에 방 두 개를 구해 네 식구와 막내 동생이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둘째도 채소가게 일을 돕기 위해 부인 딸과 함께 여인숙으로 들어왔다. 성빈씨는 “중국에선 큰 걱정 없이 편하게 살던 중국인 아내가 특히 고생을 많이 했다”며 “한국이 이렇게 살기 힘든 나라였으면 오지 않았을 거라며 운 적도 여러 번”이라고 말했다.

형제가 모두 달라붙어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지금은 시장에서 세 곳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삼형제와 부인들까지 포함해 10명이 일하는 가게 세 곳의 매출은 연 10억원이 넘는다.

새 도전 나선 형제들…고향에 김치공장

요즘 임 사장은 태평시장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가게 두 곳은 동생들 앞으로 명의를 바꿨다. 12월엔 남은 채소가게도 막내 동생에게 넘길 생각이다. 그런 다음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셋째 윤빈씨(41)와 함께 고향에서 김치 공장과 식자재 공장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다. 식자재 공장에서는 지난봄 고사리 10t과 양파 10t을 가공해 라면 스프용 등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임 사장은 전통시장이 활로를 찾으려면 상인들도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시설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6000만원을 들여 과일가게에 냉장 진열대, 에어컨, 에어커튼 등을 설치해 가게 내부를 마트처럼 꾸몄다. 덕분에 매출이 두 배나 늘었다고 했다.

기독교 신자인 성빈씨의 꿈은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다.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방황하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신앙에 의지했던 친구 10여명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성빈씨는 “매달 친구들이 보내온 선교지의 사진과 글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고 말했다. 제빵 기술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도 훗날 선교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맛난 ‘빵’을 직접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120여개의 점포가 있는 태평시장에서 몇 안 되는 30대 상인인 막내 태종씨는 전통시장 발전에 관심이 많다. 2010년 큰형이 상인회 총무로 일할 때 시장 안에 카트를 도입한 것처럼 젊은 세대를 전통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싶다고 했다.

임 사장 형제들은 ‘나누는 삶’도 조용히 실천하고 있다. 첫 가게를 낸 2006년부터 수시로 시장 인근 독거노인들에게 쌀과 채소를 제공하고, 경로당 두 곳과 푸드뱅크에도 채소와 부식을 전달해왔다. 그동안 임 사장이 경로당을 찾은 것은 한 번뿐이다. 그는 “자주 찾아뵈면 좋겠지만 그러면 연세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시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며 “장사를 계속하는 동안 어린시절 우리 형제들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며 살기로 동생들과 약속했다”고 말했다.

대전=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