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대우패망秘史 2-그들은 빈정거렸다
기억을 짜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헌재 회고록《위기를 쏘다》에는 사실(facts)이 적다.《김우중과의 대화》는 자기 최면에 가깝다. 이헌재 전 장관은 “대우는 자살도 타살도 아닌 병사(病死)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제 곽수일 서울대 교수는 “대우 해체는 김우중 회장이 ‘자초한 기획해체’”라고 말했다. 그는 대우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하기도 했다. 기획해체에 방점을 찍는 것도 논리적이다. 1970년대 재벌해체론으로부터 형성된 오랜 반(反)기업 적대 진영의 기획 말이다. 그들은 대우의 병사를 지켜보며 냉소를 날렸고, 시체를 치우면서 침을 뱉었다.

며칠 전 김우중 회장은 “당시 내가 국내 사정을 잘 몰랐다. 1년에 240일씩 해외로 나돌아 다니는 사람이 국내 상황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는 말을 했다. 무엇보다 정권 교체를 김 회장은 과소평가했다. 해방 후 처음으로 동에서 서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그리고 보수에서 진보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재벌 대기업을 경상도 정권과 동일시하는, 본능적 적대감이 신권력을 지배했다. 김 회장은 이 점을 몰랐다. 재계에도 물리적 인적 청산이 필요하다는 권력 측의 주장이 난무했다. 사정 태풍이 몰아칠 뻔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부랴부랴 소떼를 몰고 북으로 올라갔다. 역시 정주영이었다. 삼성조차 김용철 변호사를 서둘러 채용할 정도로 허둥지둥하던 시절이었다. 김우중은 DJ를 동맹군이라고 착각했다. 좌익 경제학자 고(故) 박현채 교수가 썼다는《대중경제론》이 이제 막 날개를 달았다.

김태동 경제수석이 재벌해체론을 꺼내든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물론 지나치게 과격한 주장이라는 이유로 폐기되었다. 그렇게 대부분 재벌은 피해 갔지만 결과적으로 부실그룹 대우는 걸려들었다. 김태동 강봉균 이윤재 등은 모두 시장주의가 아닌 구조개혁 라인업이었다. 처음부터 기업을 이해하는 뇌 구조가 아니었다. 1998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클린턴은 놀랍게도 5대 재벌의 개혁이 지지부진하다고 비판했다. 대우차를 인수하려던 GM의 로비였을 수도 있지만 한국 측 요구였을 수도 있다. 사실 IMF와의 협상부터가 그랬다. 한국 경제관료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개혁 과제를 IMF 측에 슬쩍 흘리고 IMF가 역으로 그 항목들을 공개리에 요구하도록 잔머리를 굴렸다. 국민들은 그때마다 IMF를 원망했다. 금융감독기구 통합 같은 것들은 그렇게 나왔다. 재벌 개혁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신흥 경제관료들의 기업관, 재벌관은 극도로 나빴다. 저주와 비판, 냉소와 빈정거리는 언어들이 춤을 췄다. 대우그룹이 몇 개 계열사를 팔아보겠다고 발표하자 “시장 가격이 낮아 잘 안 팔릴 것”이라며 소금을 뿌렸다. 산업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이미 두 차례에 걸쳐 기업 과잉투자의 뒤치다꺼리를 맡아왔던 그들이었다. 기업이라면 이마를 찌푸리고 재벌이라면 고개를 돌렸다. 대우그룹의 마지막 구조조정 몸부림이었던 1999년 7월 김우중 회장의 사재출연에조차 그랬다. 사재출연 발표가 나오자마자 강봉균은 “김우중은 이미 대주주 자격을 잃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한마디로 계열사 매각은 물건너갔다. 김우중은 강봉균을 탄핵하는 편지를 썼지만 대통령의 회신은 없었다. 강봉균 전 장관은 지금도 빈정거리는 어투로 이야기하는 말투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의 말투는 종종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이헌재는 치밀한 해체 작업이었다고 자랑했다. 복잡한 워크아웃 절차를 말한 것이었지만 대우 해체를 말하는 중의적 어법일 수도 있다.

대우가 법정관리를 추진했을 때 청와대는 “그랬다가는 험한 꼴 보게 될 것”이라며 법정관리 아닌 워크아웃으로 몰았다. 신흥 관료들의 기획해체라는 주장에 한 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독설의 포화는 지금도 교환되고 있다. 최근 김 회장의 한 측근은 이헌재와 강봉균이 안철수 진영에 들어갔던 일을 놓고 “원래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라고 비꼬았다. 김 회장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