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즐거운 복희’의 주인공 전수지 씨가 서울 동소문동 연습실에서 연기에 몰입하고 있다.
연극 ‘즐거운 복희’의 주인공 전수지 씨가 서울 동소문동 연습실에서 연기에 몰입하고 있다.
총 5막 중 2막 중간쯤이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 시절 증조할아버지가 받은 작위를 대대로 이어받았다는 자칭 ‘백작’은 호숫가 갈대밭에서 발견한 낡은 보트를 끌고 온다. 백작은 “귀족은 요트가 있어야 하는 법”이라며 ‘펜션 주인 동료’들에게 졸지에 ‘요트’가 된 보트 이름으로 ‘산타마리아’호와 ‘산타루치아’호 중 뭐가 좋을지 물어본다. ‘건달’ 청년 조영욱은 “산타루치아는 이탈리아 민요 이름이죠”라며 ‘산타루치아’ 마지막 두 소절을 우렁차게 부른다.

연극 ‘즐거운 복희’ 연습이 한창인 지난 19일 서울 동소문동 삼성빌딩 지하 1층 한빛예무단 연습실. 배우들의 연기를 날카롭게 지켜보던 연출가 이성열이 “잠깐만”하고 극을 중단했다. “그 부분을 힙합식으로 한번 해보지.” 조영욱 역을 맡은 배우 박혁민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바로 힙합 동작을 취했다.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그 장단에 맞춰 옆에 있던 배우 박완규는 두 다리를 번갈아 올리며 힙합 춤을 추고, 장내는 잠시 웃음바다가 됐다.

오는 26일부터 내달 21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는 ‘즐거운 복희’는 올 하반기 연극계 최대 기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파수꾼’ ‘봄날’ ‘북어대가리’ 등 우리 시대의 모순을 우화적인 기법으로 날카롭게 담은 작품들로 한국 연극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극작가 이강백(67)의 신작이다. 그는 이 작품을 “4년간 일곱 번의 수정을 거쳐 태어난 산고의 결실”이라며 스스로 ‘제2의 데뷔작’이라고 부른다. 섬세하고 치밀한 연출의 이성열 극단 백수광부 대표가 처음으로 무대화한다.

어느 한적한 호숫가 펜션 마을이 배경이다. 2막과 3막 사이 막간극.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맞춰 신나게 춤추며 노래하던 스무 살의 복희는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짓고 독백한다. “하지만 난 슬픈 복희예요. 날마다 언덕 위 무덤에서 눈물 흘리는 복희…. 이곳에서는 난 즐거운 복희가 될 수 없어요. 그건 내 역할이 아니거든요. 마치 배우처럼 슬픈 복희가 내 역할이죠.”

연극은 펜션 주인들이 돈을 벌고자 만들어낸 ‘슬픈 복희’에 갇혀 사는 복희가 원래 모습인 ‘즐거운 복희’가 되려고 분투하는 이야기를 통해 실재와 허구의 경계 및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다. 이 대표는 “거짓된 이야기와 정보가 사회를 통제하고 개인을 억압하고 진실을 가리는 시대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질타하는 작품”이라며 “삶의 여러 가지 모습이 은유적으로 녹아 있다”고 설명했다.

형식이 독특하다. 펜션 주인들이 ‘복희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본극과 복희의 독백만으로 구성된 막간극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극의 중심에 있는 복희는 막간극에만 등장한다. 이 대표는 “연극을 20여년간 해왔지만 이런 구성은 처음 본다”며 “이야기의 해석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장치로 형식적인 재미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복희 역의 전수지는 “7~8분씩 나오는 네 번의 막간극에서 각각 전혀 다른 복희의 감정과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며 “쉽지 않은 역할이어서 연출님과 ‘나머지 연습’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60대 베테랑 배우들인 이인철 이호성과 30~40대 개성파 배우인 강일 유병훈 박완규 박혁민이 만들어낼 ‘연기의 합’도 기대를 모으는 대목이다. 박완규는 “두 분 선생님(이인철 이호성)이 중심을 잘 잡아주신다”며 “여러 세대가 어우러져 있는 점이 좋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