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부동산 규제, 잘못되었기에 철폐한다
세 칸 초가집을 가지는 것은 조선시대 상민들의 소원이었다. 대부분은 더럽고 어두운 한 칸 방에 대여섯 자식들과 함께 삶을 구겨 넣었다. 대한민국 베이비부머들에게도 ‘내 집’은 콤플렉스였다. 그것은 평생의 근면에 대한 작은 보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착각과는 달리 지금은 14년치 소득이면 주택을 마련할 수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30대 맞벌이 부부가 은행대출을 끼면 겁도 없이 집을 산다. 그래서 집 문제에 관심조차 없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대신 외제차를 탄다. 아버지 집도, 할아버지 집도 시간이 지나면 내 집이 된다. 경쟁자도 없다. 그것이 역으로 전세를 밀어 올린다. 그러나 저금리 금융비용을 계산하면 전세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금리가 연 5%에서 2.5%로 떨어지면 1억원 전세가 2억원으로 올라도 주거비용은 동일하다.

올스톱되다시피 한 서울 시내 재개발 재건축도 그런 경우다. 재개발 재건축은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민주주의 수준을 증명한다. 그런데 주민들의 합의 절차는 종종 난장판이 된다. 조합장들은 필시 횡령 배임으로 구속된다. 그러나 재건축을 추진하는 동네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는 지금도 역설적이다. ‘축! 안전진단 통과’다. 이 현수막은 마치 이 동네 아파트가 안전하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축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는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결국 정부가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공관리라는 이름으로 구청들이 끼어들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의결정족수도 엄격해졌다. 70% 아닌 50% 동의만으로 조합을 무효화할 수 있고 조합원 과반수의 출석을 요구하는 조항은 많아졌다. 이런 규정들은 국회선진화법 못지 않게 주민들의 민주적 합의를 틀어막는다. 돌아보면 모든 규제는 같은 이유를 내세운다. 자산시장은 빈익빈부익부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규제는 필수적이며 부동산은 불로소득이라는 주장이다. 분양가는 정부가 정하는 원가에 적정이윤을 더한 것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윤에 대한 주자학적 개념의 부활이다. 소형평수 의무비율이나, 개발이익 환수는 오로지 개발동기를 삭감하는 것이 목표였다. 흥부가 집을 살 수 있는 기간은 그렇게 14년에서 더는 단축되지 못하고 있다. 착한 바보들은 언제나 꼭같은 방식으로 사태를 그르친다.

‘축! 안전진단 통과’라는 말은 실로 부자연스럽다. 내 집 고쳐 짓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증좌일 뿐이다. 경제행위의 자유는 사회 전체를 공정하게 취급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바보들은 이 점을 잊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허둥지둥 규제를 만들어 낸다. 층수 규제도 풀어야 마땅하다. 한강변을 성냥갑 병풍으로 둘러친다는 것은 실로 몰취미다. 100층짜리 아파트가 안 된다는 것은 대체 누가 정한 기준인가. 혹자는 수십년 후 재건축 문제를 걱정하지만 그것은 당사자들이 걱정할 문제다. 땅에 붙어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지기(地氣)가 필요한 당신이나 그렇게 하면 된다. 세입자 문제는 불법적인 용산점거 사태를 불렀다. 연민은 더 큰 연민을 불러내면서 사태를 그르친다. 이는 임대주택 공급 등 전혀 별개로 다룰 문제다.

부동산 규제의 본질은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는 것이다. 난개발이 전체의 이익에 반한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교통대책이나 사회간접자본(SOC) 때문에 규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결사반대!’ 등의 현수막은 과연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한 건으로 팔자를 고치겠다는 과욕도 마찬가지다.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과정에서 보듯이 과욕은 모두의 실패를 낳고 만다.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정치와 정책으로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정부는 손을 떼는 것이 좋다.

집값은 인구동학에서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최경환 경제팀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베이비부머 집단의 은퇴가 이미 시작되었다. 이는 큰 제약조건이다. 규제는 실효성 여부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잘못되었기에 철폐하는 것이다. 건별로 효과를 계산한다면 결과는 필시 나빠진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