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제자유도부터 높여야 한다
한국 경제가 당면한 어려움을 한마디로 진단한다면 그 병명은 ‘수요부족형 경기침체’일 것이다. 수요부족형 경기침체의 예후는 좋지 않다. 구조적인 경기침체는 더욱 그렇다.

우선 수요와 투자의 부진으로 경제 활력이 떨어진다. 수요 부진이 투자 부진을 초래하고 이에 따른 일자리 위축과 임금의 정체 또는 하방 압력이 다시 수요 부진으로 이어지면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지속적인 물가 하락의 기대가 형성되면 디플레이션 압력도 커진다. 이런 증상들이 고령화 등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와 맞물리면 성장잠재력을 심각하게 위축시킨다.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주홍글씨가 남의 일만은 아니다.

구조적인 수요부족형 경기침체에 대한 처방전은 잘 알려져 있다. 수요 침체를 되돌려 놓을 불쏘시개가 필요하다. 민간이든 정부든 여력이 있는 경제주체의 소비를 늘리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확장적인 재정 및 통화정책은 바람직하다. 문제는 이런 정책수단은 지속 가능성이 낮고 구조 개혁이 뒤따르지 않으면 부작용이 크다는 점이다. 그나마 건전했던 재정이 부실해지고 가계부채는 계속되며 기업의 투자는 여전히 부진한 와중에 투자가 해외로 이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책방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동안 정치적인 이유로 애써 피했거나 현실적인 어려움 등을 이유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경제구조 혁신의 길을 이제는 가야 한다. 시급한 몇 가지만 보자. 첫째, 기업 투자의 필요조건인 경제자유도를 높여야 한다. 원칙적으로 안전에 문제가 없다면 경제활동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에 노출돼야 한다. 규제 개혁도 효과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각종 영업활동에 요구되는 자격증 또는 면허증 요건과 인허가 규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다.

둘째, 노동시장이 유연해야 한다. 고용의 안정성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막는 수준이 돼서는 곤란하다. 우리 노동시장은 취업자와 취업 희망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제로섬 게임에 빠져 있다. 특히 청년실업은 결혼 지연 또는 기피현상으로 이어져 저출산을 가속화하는 부작용이 있다. 통상임금, 정년연장, 임금피크제, 최저임금 등 노사 이슈를 한데 모아 노동시장의 제로섬 게임을 타파할 노·사·정 빅딜이 절실하다.

셋째, 보다 적극적인 인구구조 대응전략이 있어야 한다. 당장 내후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줄고 출산율은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머물러 있다. 무엇보다 양질의 공공보육체계 확충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양질의 유아기 보육은 인적 자원의 지적 및 사회적 역량을 좌우하는 것은 물론 출산율 제고에도 가장 효과적이다. 보육시설 설치 의무가 기업의 중요한 사회적 책임으로 인식돼야 하고, 보육세 신설 등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연 20만명 수준의 대량 이민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전략적 산업정책도 필요하다. 21세기 거대산업으로 등장하고 있는 의료보건서비스의 산업화를 서둘러야 한다. 머지않아 글로벌 시장 형성이 기대되고 산업연관 효과가 큰 품목에 대해 관련 기업들로 생태계를 구축하며, 생태계 차원의 경쟁력을 높이는 입체적인 민관 합동 전략이 필요하다. 배터리, 소재, 소프트웨어 등 연관 산업의 생태계 경쟁력이 중요한 전기차가 좋은 예다. 중소기업정책도 혁신이 필요하다. 기술혁신과 그 사업화에 지원을 집중하고, 지원제도의 수를 점차 줄여 자생력 있는 기업을 키워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대응은 빠를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고 고통과 비용은 적다. 지도에 없던 길이 아니라 이미 지도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지만 용기가 없어 갈 수 없었던 그 길을 가야만 한다.

이창양 < KAIST 정책학 교수 drcylee@kaist.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