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빨간불 더 강해진 벼랑끝 한국 경제
‘마이카 시대’에 작별을 고한 뒤 택시를 타는 일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택시기사에게 최근 영업사정이 어떤지 물어보게 된다. 택시업계의 업황이야말로 경제활력을 알아보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요즘 택시기사들의 심기는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포기할 만큼 지쳐 있다. 어렵기는 택시업계뿐 아니다. 전통시장, 의류업, 음식업, 도소매업은 물론 대형 유통업계에까지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2012년 웅진그룹에서 시작된 기업부실사태가 지난해 STX그룹에 이어 동양그룹까지 이어졌고, 최근엔 간판기업들의 수익성마저 악화되고 있다. 원화 강세에 취약한 건설·조선업종에선 부실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믿었던 수출전선도 무너지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한국 수출의 30% 내외를 차지했던 대중국 수출이 올 상반기 0.1% 감소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9.7% 늘었던 것에 비하면 큰 반전이다. 반도체·평판디스플레이·석유제품 등 상위 10개 품목 비중이 61.0%나 될 정도로 대중 수출은 일부 품목에 집중돼 있는데 최근 중국이 그 일부 주요 품목의 수입처를 다른 나라로 바꾼 탓이다. 중국은 내수 확대로 정책을 전환했는데 한국 수출은 여기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탓도 있다. 한국은행이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적시한 바처럼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못 갚는 한계기업이 2009년 10.2%에서 2012년 15%로 증가했다는 점이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비 및 투자 부진으로 서민경제가 활력을 잃고 중견기업들마저 부실화되는 경제상황이고 보니 필자의 뇌리에 각인돼 있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기까지의 상황이 떠오른다. 당시 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심각한 외화유동성 부족현상이고, 만기구조 불일치 상태에서 급격히 자금이 빠져나가 한국 경제가 자력으로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1997년 경제위기는 단순한 외화유동성 위기만은 아니다. 생산성 향상에 걸림돌이 된 여러 규제장벽, 기업과 금융의 취약한 수익구조, 고비용저효율의 취약한 경제기반 등 한국 경제에 내재한 구조적 문제점들이 근본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 대내외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운영 시스템은 규모의 성장에 따르는 내재적인 변화 요구도 수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대외적인 환경에 맞춰 효율적으로 경쟁적 입지를 확보하는 데도 한계를 드러냈다. 고비용저효율과잉투자 및 후발개도국 추격으로 채산성을 상실한 산업과 기업들이 속출했고 대대적인 산업구조조정과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11월 외환위기가 발생할 때까지 성장, 물가, 재정운용, 통화관리 등 표면적인 경제지표들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라고 확신했다. 정부의 혁신과 규제완화에 대한 논의는 무성했지만 지금처럼 실행은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그러다 보니 금융개혁법안의 국회통과 무산이나 노동시장 개혁법안의 국회통과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지도력 상실이 오히려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신용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지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글로벌 기업들과 달리 한국 기업들은 실적 부진에 고전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거대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강세분야를 잠식하고 있고 일본 기업들도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에 회생하는 모습이다. 최근 삼성전자의 어닝쇼크와 현대자동차의 성장 정체, LG위기론 등은 개별 기업 문제가 아니라 산업 전체의 근본적 문제로 봐야 한다.

박근혜 정부 1기 경제팀은 경기진작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지만 구조적인 소비부진과 투자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2기 경제팀이 들어서게 됐다. 며칠 전 세간의 이목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와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만남과 향후 금리인하 여부에 쏠렸다. 그러나 두 경제 수장이 공유해야 하는 것은 금리인하 문제가 아니라 작금의 경기침체를 어느 정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다. 문제의 출발은 경기상황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인실 < 서강대 경제학 교수 insill723@sog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