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헨드릭스 디스커버리그룹 창업자 "많은 채널 중에 왜 다큐멘터리는 없지?"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다.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산골에서 땅을 파고 나무를 깎으며 몇 날 며칠 구슬땀을 흘렸다. 그러고 나면 근사한 집 한 채가 뚝딱 만들어졌다. 아버지의 집은 곧 일감이 있는 곳이었다. 가족들은 미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살았다. 황무지에 집이 만들어지고 시골이 도시가 되어가는 풍경을 늘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가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TV를 보다가 온통 연예 오락 프로그램만 넘쳐나는 것에 은근히 화가 났다. 리모컨을 수없이 돌리던 그는 한마디를 던진다. “대체 이 많은 채널 중에 왜 다큐멘터리는 없는 거야?”

사소한 불만 한 마디는 30년 뒤 그를 세계적인 논픽션 미디어그룹의 회장으로 만들었다. 그가 만든 회사는 현재 시가총액이 미국 4대 방송사(ABC CBS NBC FOX)보다 더 많다. 또 세계 215개국 19억명의 가입자에 45개 언어로 방송하는 미디어 제국이 됐다. 미국 방송의 역사를 새로 쓴 존 헨드릭스 디스커버리그룹 창업자(62)의 이야기다.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

헨드릭스의 창업은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헨드릭스가 다큐멘터리 전문 방송인 ‘디스커버리’를 만든 1985년 당시, 그는 앨라배마대를 갓 졸업한 회사원이었다. 그가 일하고 있던 회사는 교육용 비디오를 판매하는 컨설팅 회사로 방송 사업과도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늘 대자연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었다. 건축업체 목수 였던 아버지와 공무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웨스트버지니아의 산골에서 보냈다. 그는 “아버지의 직업상 일이 있는 곳으로 계속 이사를 다녀야했지만 웨스트버지니아에서의 추억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다”고 말한다. 홍수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던 그는 당시 자연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헨드릭스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 늘 자연과 우주가 떠오른다”며 “우리 가족은 웨스트버지니아를 떠난 뒤에도 강과 산이 그리워 여름마다 다시 찾아가곤 했다”고 말했다.

작은 호기심이 만든 큰 성공

그가 다큐멘터리 왕국을 세운 1980년대 초반은 케이블 방송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기였다. 1979년 미국 대법원이 HBO와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의 소송전에서 위성방송 사업을 허가했고, 이후 수많은 채널이 생겨났다. 당시 헨드릭스는 모교인 앨라배마대 허츠빌 캠퍼스의 방송부에서 다큐멘터리 분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다큐멘터리 전문 TV채널도 생겨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할 것 같았던 일이지만 몇 년이 지나도 생겨나지 않았다. ‘누가 그 지루한 다큐를 하루 종일 TV로 보겠느냐’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몇 년을 품어온 꿈을 버려둘 수 없었던 헨드릭스는 500만달러를 투자해 ‘디스커버리’ 채널을 만들었다. 창업 초반에는 자체 프로그램 없이 라이선스 방식으로 다큐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독립 채널로 지역 망 사업자(SO)의 지원을 받지 못해 초반에는 15만 가입가구를 넘지 못했다. 투자 비용이 고갈되자 헨드릭스는 케이블 SO들과 주식 지분을 교환하는 것으로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TCI, 콕스케이블 등이 투자자로 등장했다. 채널을 만든 지 1년 만에 디스커버리 가입자는 700만명으로 늘었고, 1988년 3200만가구까지 늘었다. 1989년에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창업 초기와 다르게 경쟁은 점점 심해졌다. 디지털 압축 기술이 발달하기 전인 1990년대 중반 54개였던 위성방송 채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2000년대 들어 순식간에 200개에서 400개로 증가했다. 헨드릭스는 위기가 찾아올수록 보폭을 더 넓혔다. 다큐멘터리 채널을 더 많이 만들었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으로 채널을 송출했다.

인터넷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온라인 비디오 서비스 업체 ‘리비전3’를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시청자가 직접 만든 콘텐츠를 방송했고, 리비전 인수 성공 이후 채널 간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세계 전역의 방송국과 케이블 채널을 인수하기로 결심한다.

힘들 때일 수록 넓게 보라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헨드릭스는 디스커버리의 해외시장 진출에 전력을 기울였다. 영국에서 시작돼 아시아, 중남미, 중동 지역에 자사의 스핀오프 채널을 설립했다. 1995년 디스커버리 채널의 국제화 전략은 디스커버리 네트웍스 인터내셔널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갔다.

디스커버리가 제작하는 대부분의 다큐 프로그램이나 정보 프로그램은 외국어 더빙이 다른 프로그램보다 쉬웠다. 성우 1~2명 정도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헨드릭스는 “콘텐츠의 주제는 세계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대자연에서부터 이웃의 일상까지 지구상 모든 것이 프로그램의 소재가 됐다.

디스커버리가 최초로 제작한 영상물은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다를 담은 것이었다. 직원들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 곳곳을 탐험했고, 때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생명을 건 포획 시리즈’는 2005년부터 2012년까지 바다 위에서 위험한 작업을 하는 어부의 삶을 담아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비즈니스의 꽃은 숫자 아닌 사람

헨드릭스는 젊은 기업인들에게 “내 삶에 하고 싶은 게 뭔지 하루하루의 꿈에 집중하라”고 강조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다면 남들이 원하는 게 아닌 자신의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지난 3월 최고경영자(CEO)와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 현재 이사회와 교육에 집중하고 있는 그는 최근 펴낸 자서전에서 “호기심을 이길 수 있는 경영전략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기부에도 적극적이다. 로웰 천문대 고문인 그는 2004년 디스커버리 채널 전문대를 세우기 위해 100만달러를 기부하고 이후 500만달러를 더 쏟아부었다. 헨드릭스는 현재 미 올림픽위원회와 아메리카필름학회 등 비영리 재단의 이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최근 ‘GET 프로젝트’와 ‘마을 허브’에 집중하고 있다. GET 프로젝트란 세계 통신 위성 인프라를 활용해 자기 마을 밖의 세상을 본 적 없는 아이와 부모에게 역사와 과학, 의학, 기술, 언어 학습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에는 114만개의 학교가 있고, 각 학교는 평균 350가구에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며 “100만개 학교에 위성 시스템을 설치하면 나의 꿈은 현실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디스커버리 채널이 출범한 이래 헨드릭스는 직원들에게 ‘우리 사업은 방송업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세상을 탐험하고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도록 돕는 일’이라고 강조해 왔다. 그는 “비즈니스를 이야기할 때 스톡옵션, 매출, 주당 순이익과 같은 숫자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고 지내는 것이 비즈니스 세계의 인간적 측면이다. 품위, 용기, 신뢰 등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야말로 비즈니스 세계를 진정 가치 있게 만든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