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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에 매뉴얼(지침)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매뉴얼은 너무 많은데 그것들이 현실에선 완전히 무용지물이 돼 버리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 닷새째인 20일. 대구 경북대 연구실에서 만난 노진철 사회학과 교수(58)는 “우리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위기대응 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경제적으로는 먹고 살 만해졌고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정신 수준’은 이에 한참 못 미친다는 지적이다.

노 교수는 2010년 ‘불확실성 시대의 위험사회학’이란 책을 펴낸 중견 사회학자다. 책은 현대사회는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 힘든, 위험과 더불어 사는 사회’이며 ‘이런 위험을 통제하지 못하면 거대한 재난이 닥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 사고로 한국의 위험 대응 능력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사실 형식적인 제도나 규제는 잘 돼 있다. 그동안 여러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그런 것들이 업그레이드됐다. 문제는 현실에선 그런 제도와 법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사고에서도 ‘선적이 제대로 됐는지, 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탔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지 않나.”

▷매뉴얼에는 문제가 없다는 건가.

“매뉴얼은 엄청 많다. (안전과 관련해) 각 분야를 다 합치면 3000개 넘는 매뉴얼이 있다. 더 이상 매뉴얼을 만들어선 안 된다. 오히려 줄여야 한다.”

▷그럼,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나.

“제도를 위한 제도, 규제를 위한 규제가 돼 버린 결과다. 직업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하는데 우리는 일이 터지면 정부에서 톱다운(top-down)식으로 규제가 떨어질 뿐이다.”

▷선진국은 어떻게 하나.

“보텀업(bottom-up)으로 한다. 직업집단에서 스스로 필요한 걸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게 직업윤리다. 우리도 선장이나 선원들의 협의체가 있다. 국가가 ‘열흘마다 교육받고 석 달마다 실전훈련 하라’고 하면 뭣하나. 현실적으로 하기 어렵다. 빛 좋은 개살구가 된다. 직업집단에서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움직여야 한다. 국가는 그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와 선진국 간에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서구는 200~300년간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직업집단에 직업윤리가 내면화됐다. 우리는 50~60년이란 짧은 기간에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를 겪으면서 이런 직업윤리가 몸에 배지 않았다. 아이들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도 직업윤리가 없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직업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난 그냥 일자리를 얻기 위해 들어왔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승무원들이 다수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다는 의식이 몸에 배어 있을 때 위기 상황에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단순히 교육과 훈련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그런 직업윤리는 어떻게 만들 수 있나.

“국가가 외부에서 개입해서 만들 순 없다. 그건 차선책일 뿐이다. 직업윤리는 직업집단 내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그런 점을 되돌아보면 좋겠다.”

▷사고 대응 과정에서 정부는 극도로 우왕좌왕했다.

“선진국의 재난대책본부를 보면 창구가 일원화돼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함부로 정보를 내보내지 않는다. 2005년 7월 런던 지하철 테러 당시 기자들이 정부에 ‘피해자가 몇 명이냐’고 아무리 물어도 정부는 ‘우리는 열심히 파악 중이다’고만 하지 숫자를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게 안 된다. 그러니까 숫자부터 틀리고 정부에 대한 불신만 커진다. 사고 초기 가장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생존자 구조 아니냐.”

▷신속한 정보 제공은 국민에 대한 정부의 의무 아닌가.

“국가에 대한 신뢰는 즉각적인 브리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확실한 정보를 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언론에 즉각적으로 브리핑하는 것은 조급증이다. 오히려 정부는 정보에 대한 ‘통제력’을 보여줘야 한다. 정부가 이 통제력을 상실하면 국민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현장의 민·관·군 구조인력 간에 정보 공유가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장에 대해 가장 잘 알고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뭔지 가장 잘 아는 현장 지휘관이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이번 경우라면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이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 거기에 국무총리가 가고, 안전행정부 장관이 가서 뭘 할 수 있겠나. 그런 건 다 쇼(show)일 뿐이다. 오히려 현장을 방해하는 것이다.”

▷총리나 장관이 현장에 안 가면 ‘안 간다’는 비판이 나오는 게 현실 아닌가.

“이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보면 총리나 장관이 현장에 가면 그분들에게 브리핑하는 데 엄청난 인력이 동원된다. 현장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현장에 있지 않고 보고 라인 앞에 서 있다. 그게 관료주의다.”

▷그럼 정부의 역할은 뭔가.

“재난 대책은 예방-대비-대응-복구 4단계로 나뉜다. 재난 발생부터 생존자를 구조하는 것은 대응 단계다. 이 단계는 철저히 현장의 장(長)이 사령부가 돼야 한다. 총리나 장관이 들어가는 단계는 복구 단계다. 재난지역을 선포하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하는 게 중앙정부의 몫이다.”

▷선진국은 그렇게 하나.

“런던 테러 때 총지휘부는 런던 경시청이었다. 2001년 미국 9·11 테러 때는 뉴욕 소방청이 구조작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2011년) 빈 라덴 사살 작전 때 작전본부 상황을 찍은 사진을 보면 실무자가 회의장 한가운데 앉아 있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옆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이런 게 선진국 문화다.”

▷우리는 왜 그런 문화가 없을까.

“관료주의 탓도 있지만 전문가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강한 권력을 신뢰한다. 무슨 일만 터지면 ‘대통령 나와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덜 성숙한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사회를 이끌고 간다는 시민의식이 약하다. 이런 국가를 ‘공권력 국가’라고 한다.”

▷이번에 언론의 보도 행태도 도마에 올랐다.


“서구 선진국에선 이런 사고가 터지면 가장 먼저 피해자로부터 언론을 차단한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재난 피해자 사진도 지면에 안 싣는다. 재난 피해자들은 심리적으로 과잉 흥분 상태에 빠진다. 이걸 잘 치유하지 못하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게 된다. 우리 언론은 이런 의식이 희박하다. 그래서 ‘반 친구가 죽었는지 아느냐’는 무지막지한 질문을 던진다. 안산 단원고 교감의 자살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사고일수록 언론이 냉정을 찾아야 한다.”

▷유언비어도 난무했다.


“자기 절제가 안 되고 있다는 의미다. 사적인 영역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비판할 순 없지만 감정을 쉽게 드러내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된 사실인 양 퍼뜨리는 것은 감정적이다. 우리는 감정을 쉽게 소비하는 데 익숙하다. 방송사들도 굉장히 감정 흥분을 조장하는 내용을 내보낸다. 그러다 감정이 식으면 금방 잊고 마는 식이다. 외국에선 이런 모습이 별로 없다.”

노진철 교수는

국내에서 ‘국가위기관리학’을 선도하는 학자다. 대형 화재나 붕괴, 침몰 등 인적 재난과 태풍, 홍수, 지진 등 자연 재난을 연구해 위기관리 관련 이론과 정책을 개발하고 있다. 올해 초부터 국가위기관리학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이후 ‘압축적 근대화와 구조화된 위험:대구 지하철 재난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내고, 서울여자간호대 최남희 교수와 함께 재난피해자 사회복귀 시스템을 만들었다. 2007년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건 때는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 사고의 초기 대응과 재난관리의 한계’ 논문으로 한국의 위기관리 체계를 점검했다.

성균관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2010년 저서 ‘불확실성 시대의 위험사회학’을 냈으며 올 하반기에 ‘불확실성 시대의 신뢰와 불신’을 출간할 예정이다.

대구=주용석/마지혜 기자 I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