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랑했던…' 별밤 파고든 현대인의 상실감
참으로 근사했다.공연을 보고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느낌은 ‘근사하다’는 것이었다.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거의 같다’ 또는 ‘그럴듯하게 괜찮다’다. 여기서는 ‘훌륭하다,멋있다’는 뜻으로 확장되는 두번째 의미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중인 연극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내는 구소련 우주비행사의 마지막 메시지’는 어찌 보면 황당하고 너무나 극적이어서 실제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같은 이야기들이다.

올레그와 카시미르란 이름의 옛 소련 우주비행사 두 명은 ‘하모니 114’란 우주선을 타고 12년째 통신이 두절된 채 기약없이 지구 궤도를 떠돈다. 스코틀랜드 수산청 공무원 이안은 런던 히드로공항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노르웨이 출신의 세계은행 공무원 에릭에게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깊은 속내를 털어놓는다. 이안이 녹음해 들려준 러시아 댄서 나스타샤의 숨소리에 매혹당한 에릭은 그녀의 몸과 마음,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 나스타샤는 에릭의 관심을 애써 외면한 채 여섯 살 때 우주로 떠난 아버지 카시미르가 내려다보고 있을 하늘만 쳐다본다.바다속으로 걸어들어간 듯한 이안의 흔적을 찾아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까지 찾아온 아내 비비안은 그 곳에서 남편을 닮은 전직 로케트 과학자 베르나르와 교감을 나눈다.

하지만 절묘하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 극작가 데이비드 그레이그가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13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영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 지구촌 곳곳과 우주까지 배경 삼아 엮은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괜찮다.감정이 사실적으로 스며든 언어들이 현대인의 보편적인 감성인 상실감과 소외, 외로움 등을 파고들어 울림을 만들어낸다. 소통되지 않음에 절망하면서도 소통이 되는 인연을 갈구하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이 절절하다. 다양한 캐릭터로 표출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관객 각자의 개인사적인 어느 지점을 건드려 공명을 일으킬 만한 무대다.

이상우의 최근 연출작은 마에스트로의 면모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선 더 두드러진다. 까다롭고 쉽지 않은 원곡을 깊이있게 해석해 빛나는 무대를 만들어냈다.별들이 찬란한 영상과 그에 대비되는 단순하고 상징적인 무대세트, 1인2역을 호연하는 배우들을 조화시켜 명연주를 들려준다.

언젠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게 될 기회가 있을 때 이 작품을 떠올릴 관객들이 많을 것 같다. 별들을 바라보면서 누군가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에 나스타샤처럼 양손을 흔들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제법 근사한 상상을 품게 하는 작품이다. 공연은 내달 11일까지, 2만~5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