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미술산책] 인생무상과 부귀영화…꽃을 바라보는 동·서양의 엇갈린 시각
여기 두 점의 그림이 있다. 한 점은 화병 속에 여러 가지 꽃들이 한 아름 꽂혀 있고 다른 한 점은 땅에 뿌리를 박은 모란을 괴석과 함께 묘사한 것이다. 앞의 것은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을 사용해 그린 서양의 전형적인 정물화이고, 뒤의 것은 동아시아(중국)에서 그려진 화훼화(또는 화조화)이다. 두 그림은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CEO를 위한 미술산책] 인생무상과 부귀영화…꽃을 바라보는 동·서양의 엇갈린 시각
정물화는 영어로 ‘스틸 라이프(still-life)’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정지된 물체를 그린 것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어로는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 곧 ‘죽은 자연’이라는 뜻이다. 영어 명칭보다 사뭇 염세적이다. 혹자는 대체 죽다니 뭐가 죽었다는 말인가 하며 반문할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창문 위 꽃병에 담긴 꽃들은 다 뿌리가 잘린 꽃들이다. 병 속에 물이 채워져 있다고 해도 얼마 안 있으면 시들어 버릴 운명이 아닌가.

정물화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처음 그려졌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교회 내부 장식을 일체 금하면서부터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성화와 조각을 납품해 호구를 해결했던 예술가들은 생존권에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결국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정물화 제작으로 눈을 돌린다. 다행히 당시 네덜란드는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중산계급이 두텁게 형성되면서 장식용 그림의 수요가 급증했다. 이들은 복잡한 상징성을 내포한 신화, 역사화 대신 꽃, 음식, 진귀한 물건을 그린 정물화를 더 선호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기독교도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인생무상이라는 기독교적 상징성을 결합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바니타스(라틴어로 ‘헛되도다’라는 뜻) 정물’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암브로시우스 보스하르트(1573~1621)의 ‘창문의 꽃병’을 보면 꽃들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곧 사라지고 말 한시성을 지닌 존재다. 이것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 숙명에 대한 상징이다. 게다가 꽃병은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역시 살얼음판 같은 인생에 대한 비유다.

동아시아의 꽃그림(화훼도)은 여러모로 보아 서양의 정물화와 대립적이다. 정물화가 죽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염세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는 데 비해 화훼도는 땅에 뿌리를 내린 자연 그대로의 식물을 배열했고 그 내용도 현세의 복을 구하는 것들이다. 때때로 의미를 보완하기 위해 동물, 곤충, 무생물인 바위가 덧붙여지기도 하는데 이때는 화조도, 초충도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청나라 말기의 화가 거렴(居廉·1828~1904)이 그린 ‘부귀백두(富貴白頭)’에서 모란꽃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모란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괴한 형상의 바위는 불로장생을 뜻한다. 바위 위에는 머리가 하얀(白頭) 두 마리 새가 사이좋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것은 부부의 백년해로를 의미한다. 이 그림은 누군가의 부귀영화, 불로장생 및 백년해로를 기원하기 위해 그려준 것임을 알 수 있다.

화훼화만 상징성을 띠었던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화가들은 그림을 하나의 메시지 전달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는 그림도 자주 그려졌다. 예를 들면 모란과 매화는 같은 계절에 피지 않지만 한 화폭에 함께 그려 넣음으로써 눈썹이 새하얗게 될 때까지 부귀와 장수를 누리라는 기원을 담았다. 모란은 부귀를 뜻하고 매화 매(梅)는 중국어로 눈썹 미(眉)와 발음이 같아서다.

무심코 장식용으로 걸었던 서양의 정물화 속에는 인생은 덧없으며 신앙을 통해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동아시아의 꽃 그림에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현세 긍정적 세계관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정석범 문화전문 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