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이 지난 11월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칼리토 카르발료사의 설치작품 ‘대기실’을 감상하고 있다. 정석범 기자
관객들이 지난 11월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칼리토 카르발료사의 설치작품 ‘대기실’을 감상하고 있다. 정석범 기자
1999년 영국 런던의 테이트갤러리에서는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상인 터너상 수상 후보전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전시를 보러온 관객들은 한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터키계 여성 작가인 트레이시 에민의 ‘나의 침대’라는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작가 자신의 침실을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작품은 정돈되지 않은 불결한 침대와 주변에 나뒹구는 낡은 속옷, 스토킹, 콘돔, 빈 술병, 담뱃갑, 신경쇠약에 따른 후유증의 핏빛 얼룩진 종이 등으로 이뤄졌다.

보수적인 예술관을 가진 관객들에게 이 작품이 던진 충격은 단순히 한 여성이 자신의 사적인 치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 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사적인 물건들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놓은 것을 과연 미술품이라고 봐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더 큰 당혹감을 느꼈다. 사실적 재현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재현하고자 했던 서양미술의 전통을 뿌리째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입체적인 물건들로 이뤄져 있지만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전통 조각은 사각의 대좌 위에 불변의 형태와 볼륨을 가진 것이었는데 에민의 작품은 전시하는 장소에 따라 침대의 위치는 물론 그 주변에 놓인 물건들의 배치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장소 특정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면 설치미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9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이후 현대미술의 중심 장르로 군림해오고 있는 설치미술은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오브제들을 작가가 주관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관객을 낯선 감각적 환경 속으로 초대한다. 그것은 형식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미술 개념에 반대해 “미술은 형식이 아니라 개념 속에 존재한다”고 보는 전위 미술운동(특히 개념미술)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설치미술이 유도하는 감각적 경험은 전통적인 조각보다도 훨씬 직접적이다. 차가운 조각상과 달리 설치미술 속에서 만나는 물건들은 관객과 친숙한 것이고, 그것들은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는 효율적인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그런 물건들은 관객 각자의 사적인 기억을 떠올려 주기도 한다.

에민의 ‘나의 침대’는 작가가 직접 손으로 빚은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품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오브제들을 주관적으로 배열해 작가가 사회에 대해 던지는 메시지를 곱씹어보게끔 한다. 그 점은 에민이 “내가 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멋진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다”는 말속에 잘 압축돼 있다.

메시지의 전달은 자연히 연극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관객에게 어떤 반응을 유도하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설치미술가의 창의성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일상적으로 쓰던 물건을 그대로 가져다 놨다고 손가락질하던 관객들도 이 부분에서는 어렴풋하게나마 과거 예술가의 흔적을 읽을 수 있으리라. 따라서 설치미술의 감상자는 자신이 연극의 감상자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전통적인 연극 감상자는 무대 밖의 지정석에서 수동적으로 감상하지만 설치미술 감상자는 무대 사이를 오가며 능동적으로 느끼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야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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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공감대를 넓히기 위한 작가의 욕망은 설치미술의 전략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바로 인터랙티브 작품의 확산이다. 미디어와 정보기술(IT) 발달에 힘입어 관객을 작품에 개입시키고 그 과정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읽게 하는 방식이다.

설치미술의 미래는 어떨까. 아마도 연극에 보다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연극보다 훨씬 더 관객 참여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새로운 형태의 연극이 되리라는 점이다. 우리가 요즘 많이 내세우는 ‘예술적인 삶’을 실현하는 훌륭한 대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