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에…퇴직연금 '비명'
의료기기 제조업체 S사의 신모 대표는 며칠 전 노조 측에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을 확정기여(DC)형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DB형 퇴직연금은 저금리로 인한 운용수익 부족분을 회사 측이 모두 책임지는 구조여서다. S사는 다음달까지 전체 근로자 800여명의 퇴직급여 충당금을 5억~6억원 추가로 쌓아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신 대표는 “시간이 갈수록 부담이 커질 가능성이 높아 노조를 상대로 꾸준히 설득할 생각”이라고 했다.

초저금리 상황이 이어지면서 연말 퇴직급여 충당금을 추가로 쌓아야 하는 DB형 퇴직연금 가입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이 운용수익에 따라 퇴직금이 달라지는 DC형 전환을 서두르면서 DC형 비중이 2005년 퇴직연금제 도입 이후 처음으로 20%를 돌파했다.

현재 총 72조원 규모인 퇴직연금은 크게 DB형과 DC형, 개인퇴직계좌(IRP)로 나뉜다. DB형은 퇴직할 때 받는 퇴직금을 근무 기간과 평균 임금에 따라 사전에 확정하는 것으로, 전체 적립금 대비 70% 이상을 점유했다. 그런데 DB형 가입 기업의 운용수익률이 임금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문제가 커지고 있다. 모자라는 금액만큼 각 기업이 근로자의 퇴직계좌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 대기업은 연내 추가로 쌓아야 할 퇴직급여 충당금이 수백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 DC형 전환 급증…"정부 세제지원 필요"

저금리에…퇴직연금 '비명'
박홍민 삼성생명 퇴직연금연구소장은 “올 들어 원리금보장형 퇴직연금의 수익률이 일제히 연 3%대로 떨어졌다”며 “임금상승률이 연 5%인 DB형 가입 업체라면 1~2%포인트의 격차만큼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성일 제로인 퇴직연금연구소장은 “퇴직연금 도입 초기만 해도 은행 보험사 등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금리 경쟁을 벌였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도 아니어서 기업 부담이 늘었다”고 전했다.

더구나 기업들은 근로자 퇴직급여 보장법에 따라 12월 말까지 DB형 퇴직연금의 적립금 비율을 최소 60%로 맞춰야 한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모든 근로자가 한꺼번에 퇴직한다고 가정했을 때 지급해야 할 퇴직금 대비 외부 퇴직계좌에 쌓아놔야 할 돈이다. DB형 퇴직연금 적립률은 2015년 말까지 70%, 2017년 말까지 80%로 단계적으로 높아진다.

DB형 퇴직연금을 도입한 기업의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자 DC형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DC형 적립금 비중은 지난 9월 말 20.8%(14조9601억원)로 처음 ‘20% 벽’을 넘었다. 반면 2011년 75.2%에 달하던 DB형 비중은 70.3%로 쪼그라들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운용수익률 하락에다 적립률 규제 등의 영향으로 DC형 비중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강용재 우리은행 퇴직연금연구소장은 “전통적으로 노조가 강하고 기업 규모가 클수록 DB형 비중이 높은데 이런 곳에서 DC형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전했다.

다만 임금상승률이 높은 일부 제조업체는 DC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사 합의를 거치지 않으면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세제 지원 등을 통해 DC형 전환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에서는 연 4만달러(또는 연봉의 100% 중 적은 금액)였던 DC형 퇴직연금에 대한 세제 지원 한도를 2011년 4만9000달러로 확대했다. DC형 전환을 유도해 DB형 가입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다.

성인모 금융투자협회 연금지원실장은 “우리나라에서 DC형 퇴직연금에 대한 세제 혜택은 개인연금저축과 합산해 연간 400만원 한도의 소득공제를 주는 게 전부”라며 “DC형 전환을 촉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