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간송미술관의 봄 특별전에 출품된 표암 강세황의 ‘운림귀조’.  /간송미술관 제공
오는 12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간송미술관의 봄 특별전에 출품된 표암 강세황의 ‘운림귀조’. /간송미술관 제공
조선 후기의 화단은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꽃피우고, 단원 김홍도가 조선 고유의 풍속화를 탄생시킨 회화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이런 조선 고유의 예술은 오랜 생명력을 지니지 못하고 18세기 말 19세기 초를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해 추사 김정희가 이끄는 문인화파(추사파)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오는 12일부터 26일까지 여는 기획전 ‘표암(豹菴)과 조선남종화파’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해준다. 표암 강세황(姜世晃ㆍ1713~1791)은 조선후기 정조시대 예술계를 이끈 최고 실력자로 그의 삶과 회화는 진경산수와 문인산수의 과도기적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올해로 탄생 300주년을 맞은 강세황은 1713년 당파 간 알력이 극심했던 영조대 남인 소북(小北)의 주도 인물인 강현의 아들이다. 그의 조부인 강백년과 부친은 모두 예조판서를 지냈고 기로소(70세 이상 고관 예우 기구)에 들어간 명망가다. 특히 강현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부친이 맏형인 강세윤의 과거시험 부정을 주도하다 들통 나 삭탈관직되는 바람에 강세황은 일찌감치 과거를 통한 출세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안과 처가에 전해 내려오던 책과 그림을 바탕으로 서화수련에 몰입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화단을 주도하고 있던 진경산수화풍은 표암의 집안과 반목하고 있던 노론계 인사 겸재 정선이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꽃피운 화풍으로 표암으로서는 따르기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그가 명대 문인화를 계승한 현재 심사정의 남종문인화풍을 따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와 표암의 작품은 농담(濃淡·짙고 옅음)이 뚜렷한 먹을 사용하고 필치가 거칠고 굳세며 반듯해서 명나라의 남종문인화를 주체적으로 소화한 것이다. 명나라 문인화에 비해 소외양반계층으로서의 쓸쓸한 감정이 두드러진 것도 특징이다.

표암이 남종문인화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청나라 사행 때 목격한 서양화법을 바탕으로 산수화첩인 ‘송도기행첩’ 제작 때 원근법과 명암법을 도입했고 겸재의 진경산수화풍도 일부 수용하는 등 실험정신으로 충만했다. 이런 겸재 회화의 다양성과 국제성은 신분이나 당색에 관계없이 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19세기 전반 추사파로 이어지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는 표암의 ‘소림묘옥’ ‘운림귀조’ 등 문인산수와 묵죽도를 중심으로 이광사 허필 이인상 최북 등 표암의 동년배와 정수영 김홍도 이인문 조윤형 등 후배 화가들의 작품 70여점이 선보인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강세황은 청나라 건륭제로부터 ‘미하동상(米下董上·송나라 때 미불보다는 아래지만 명나라 때 동기창보다 위라는 뜻)’이라고 극찬을 받았다”며 이번 전시가 “강세황의 수준 높은 문인화의 세계를 감상하면서 추사파 등장의 배경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02)762-0442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