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라면상무'와 대한항공이 잃은 것
“승객의 신상 정보뿐 아니라 승무원 리포트까지 유출되도록 방치한 항공사도 사과해야 합니다.”

외국계 항공사 임원은 ‘대기업 임원의 기내 승무원 폭행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항공업계에서 20여년간 일한 그는 “보안사항인 상세 운항 일지까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은 외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최근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이른바 ‘라면 상무’ 사건에 대해 항공사도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행 대한항공기에 탑승한 포스코에너지 임원이 “라면이 맛이 없다”며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은 2주일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해당 임원은 이름과 가족관계,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돼 네티즌의 몰매를 맞았고, 결국 회사를 떠났다.

이번 일이 ‘신상털기’에서 끝나지 않고 각종 패러디물로 확대재생산된 데는 승무원 리포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언론의 사건 보도 이틀 뒤 공개된 운항 일지에는 해당 임원의 언행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문건은 승객의 소란, 기기 고장, 기내 안전 등 기밀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항공 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에 따라 외부 유출이 금지된 내용이다. 위반한 항공사는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유출 경위가 어떻든 보안에 구멍이 뚫린 심각한 문제”라며 “국내 1등 항공사의 처신이라기엔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다른 항공사 승무원들도 씁쓸해 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지역 항공사 직원은 “대한항공은 항공사 가운데 갑(甲) 중의 갑”이라며 “다른 항공사였더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졌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로 승무원 처우가 개선되기보다는 승객들이 개인정보 유출이 두려워 승무원을 기피할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일로 포스코 내부에서는 “지난 45년 동안의 ‘갑(甲)’ 근성을 버려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점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려온 포스코의 조직 문화를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항공사도 초기 대응에 미숙했던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다. 대한항공 측은 고객 정보 관리의 허점을 노출하고도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 대한항공은 을(乙)의 얼굴을 한 갑(甲)이 아닌지 돌아볼 때다.

전예진 산업부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