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집 속의 인간 군상에서는 가슴 저미는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후세에 내가 살아간 시대의 전체적인 사회구조가 이러했다는 역사적 증언으로 기록을 남기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사는 시대를 한 단계 높여 역사적 영원성 속에서 투시해보고자 했다.”

가끔 사람들은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자신의 역사를 사진을 통해 영원히 기억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런데 타인,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찍음으로써 인간과 사회를 기록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이가 있다. 원로 사진가 최민식 씨(85)다.

《휴먼 선집》은 최씨가 55년 동안 출간해온 《휴먼》이라는 사진집 14권에서 사진가로서의 철학을 가장 잘 나타낸 사진 490여점과 에세이 15편을 엮은 책이다. 그는 1957년 사진에 입문한 후 “인간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의 가치를 확고하게 믿는다”는 신념으로 리얼리즘적 인물 사진만을 흑백으로 찍어왔다. 사진 속 배경뿐 아니라 인물의 표정에서도 사회구조가 드러난다고 믿는 그다. 그래서 사진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사람들은 과거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모든 사진은 사회적”이라고 한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난 55년을 담은 사진집인 동시에 역사책이며, 미시사인 동시에 거시사이다.

사진은 그가 주로 활동했던 부산·경남 지역을 배경으로 하며, 대체로 시간 순서대로 배치돼 있다. 14개의 장(章)이 이어지는 동안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삶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삶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무표정해진 1960~1970년대의 모습에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있거나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얹어놓은 젊은 여성의 모습도 등장한다.

1980~1990년대 사진에도 1960년대 사진 속 인물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인물들이 많이 섞여 있다. 변화의 수레에 올라타지 못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드러내는 듯하다. 1980년대와 1960년대의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은 구분하기 힘들다. 압축성장의 한국 사회에서 20여년을 살아내도 이들의 삶은 버겁기만 했다.

모든 시대에 등장하며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건 신문배달부 사진이나 선거 벽보를 배경으로 한 사진이다. 1980년 부산에서 찍힌 사진(137쪽)에서는 국회의원 후보 4명의 선거 벽보 아래 초상화를 파는 노부부가 있다. 국회의원 후보자 사진 밑에는 그들이 파는 초상화가 있고, 그 밑에는 ‘토정비결 봅니다’라는 글씨가 있다. 노인은 여전히 조선시대의 감투를 쓰고 있다. 선거가 표상하는 근대와, 토정비결이나 감투가 상징하는 전근대가 기묘하게 섞여 있다.

‘인도, 전두환 대통령 초빙’ ‘對韓(대한)투자 뒤탈 없다’ ‘레이건 49개주 휩쓸어 재선’ ‘5공 청산 빠를수록 좋다’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취임’ 같은 기사가 실린 신문을 배달하는 이들은 아이들이거나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들, 혹은 무표정한 아주머니다. 이들은 레이건의 재선이나 인도의 전 대통령 초빙과 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세상의 흐름에서 다소 비껴나 있는 민초들의 삶을 표현한다.

저자는 “사랑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리얼리즘에 대한 신념, 사진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로 평생을 살았던 그의 사진이 세월을 넘어 가치를 발하는 이유다. 사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독재의 위협을 견뎌낸 그는 현대적으로 변한 자갈치 시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마냥 좋아 찍었는데,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나 보네, 아지매들 다 어디갔나 모르겠네. 사진 잘 나왔는데….”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