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이병철 정주영 회장 등이 활약하던 시절에는 많은 경우 의사결정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최고경영자의 ‘감(感)’이었다. 오늘날에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여전히 의사결정권자의 감각과 판단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이상 최고경영자의 본능적인 느낌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기에는 비즈니스 환경이 너무 복잡해졌다.

많은 기업들이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의사결정’에 주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빅 데이터’다. 빅 데이터는 크기, 다양성, 생성 속도와 수직 빈도의 측면에서 종전 방식으로는 수집, 저장, 검색, 분석할 수 없는 데이터를 의미한다. 최근에는 관련 인재, 조직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확대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엄청난 양의 가치있는 정보가 있는데 너무 커서 도무지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논의되고 발표된 빅 데이터 관련 기사나 발표 자료 등을 살펴보면 대부분 빅 데이터의 정의와 장점을 언급하면서 외국의 선진 사례를 들고, 결국은 어떤 기술 또는 솔루션이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대부분이다. 과연 빅 데이터 활용의 필요성을 간절히 느끼고 있고, 이를 준비하는 기업에 최신 솔루션 도입이 가장 급한 일일까. 기업에서 정보기술(IT)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지난 20년간의 경험을 통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트라넷, 전사적 자원관리(ERP), 고객관계관리(CRM) 등 IT 정보시스템이 기업의 주요 경쟁력으로 인식되던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많은 기업이 앞다퉈 각종 솔루션을 도입했다. 그러나 효과는 기대처럼 즉각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하는 방식이나 역할에 변화가 생기면서 큰 혼란이 생겼다. 당시에는 대부분 IT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IT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비즈니스에서 IT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그래서 모두 우왕좌왕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T 관련 학회 및 컨설팅 업체들은 ‘IT 거버넌스’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IT를 관리하기 원하는 기업들에 소개했다. 이후 IT 거버넌스 체계를 잘 정립한 많은 기업들은 효과적으로 IT 조직 및 자원을 관리하고, IT를 활용해 대내외 비즈니스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빅 데이터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반복될 수 있다. 빅 데이터라는 새로운 개념이 조직에 도입되면 마케팅 부서에서 IT 운영·관리 부서까지 전 조직에 걸쳐 일하는 방식과 역할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혼란이 불가피하다. 빅 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비즈니스에 도전하려는 기업은 빅 데이터를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와 요소별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을 우선해야 한다.

테마 파크와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디즈니는 빅 데이터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고 준비, 활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디즈니는 오랜 기간 축적된 고객들의 이동 경로, 구매 성향 및 구매 이력 등 다양하고 풍부한 데이터를 분석해 고객이 지불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적합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시, 고객별 수익성을 극대화했다. 또 언제, 어디에, 어떤 인원을 얼마큼 배치할 것인지와 같은 인력 운용에도 빅 데이터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사실 디즈니는 2005년부터 기존에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내부 혁신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200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빅 데이터 인프라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시작이 빨랐지만 시행착오도 많았다. 디즈니가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깨달은 것은 빅 데이터 거버넌스 정립이 정작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디즈니는 빅 데이터를 활용해 어떤 사업 성과를 낼 것인지 목적을 분명히 하고, 기존 IT 조직에 변화를 줘 빅 데이터를 전담할 조직을 구성했다. 그리고 빅 데이터를 활용하기 위해 어떤 인력을 채용하고 육성해야 하는지, 기존의 규정과 정책 중 개선할 사항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꼼꼼히 살피고 정리해 나갔다.

몇 년 전 한 금융회사 프로젝트에서 만난 마케팅 담당 임원은 회사에 축적된 데이터들을 새로운 비즈니스를 위한 보물창고에 비유했다.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하지만 그 당시는 빅 데이터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도 없어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몇 년 사이에 환경이 급변했다. 이제는 ‘빅 데이터’라는 용어가 언론 매체에도 자주 오르내리고 업계와 학계에서 관련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기업들의 관심을 끄는 솔루션과 기술이 속속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빅 데이터 도입을 위한 첫걸음을 떼는 우리 기업들에 가장 필요한 것은 디즈니가 한 것과 같은 거버넌스 정립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빅 데이터 시대에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준비하는 기업들은 기술과 솔루션도 중요하지만, 빅 데이터를 비즈니스에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선제적 틀인 거버넌스 정립도 중요하다.

이창수 <언스트앤영 한영 시니어매니저>